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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탈북청년 남한 적응기…요절한 후배 이야기 담았죠”
영화 ‘무산일기’ 박정범 감독
영화에 빠져드는 다양한 방법이 있고, 영화감독이 되는 가지각색의 길이 있다. 그 중에서도 ‘무산일기’의 박정범〈사진〉 감독은 좀 특별한 사례다.

“군에 갓입대한 졸병 시절이었습니다. 마침 외출 명령을 받아서 내무반원들이 같이 볼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야 했어요. 말 안 해도 ‘간첩 리철순’이나 ‘박하사랑’ 같은 영화(에로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는데 하필 부대 근처 비디오가게에서 헌병을 만났어요. 야한 영화를 빌리면 끌려갈 것 같아서 대여한 것이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였어요. 부대로 들어가서 욕은 욕대로 먹고 점심도 못 먹고 하루종일 앉아 제가 빌려온 영화를 보는 벌을 받았습니다.”

누구라도 앉은 자리에서 열 몇 시간 똑같은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본다면 영화에 눈이 뜨이지 않을까. 영화에 관한 한 문외한이나 다름없던 ‘체육대생’ 박정범 감독은 이때부터 영화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학교(연세대 체육교육학과)에 복귀해선 마침 개설된 교양강좌인 영화제작실습 과목을 들으며 과제였던 첫 단편영화 ‘사경’을 찍었다. 이것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대상을 받았고, 졸업 후엔 동국대 영상대학원에 진학했다. 재학 중 이창동 감독의 ‘시’ 조감독이 됐고, 영화 촬영 전 졸업작품으로 찍은 영화가 탈북자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무산일기’다. 박 감독이 주연까지 겸한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시작으로 마라케시(대상), 로테르담(대상ㆍ국제비평가협회상), 도빌영화제(심사위원상) 등 국제영화제 수상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박 감독은 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는 ‘괴물 신인’이다.

“대학시절 교양과목을 수강하는데 죽어라 공부해도 C밖에는 안 나오는 거예요. 다른 학과 학생들과 토론을 해도 헤세가 누군지, 카뮈가 뭐 하는 사람인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죠. 체대생으로 지적 수준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친구에게 토론과 강의에서 나오는 이름들을 다 써달라고 해서 도서관에서 책만 보며 살았습니다.”


영화도 그렇게 공부했다. 아버지께서 된장공장을 하시는 강원도에 틀어박혀 몇 개월간을 세계 100대 영화, 칸ㆍ베를린ㆍ베니스 수상작들을 외울 정도로 보고 또 봤다. 여기에 대학시절 같은 과 절친한 후배였던 탈북자 후배의 이야기가 더해져 ‘무산일기’가 완성됐다. 이 영화는 한 탈북자 청년이 남한 적응과정에서 겪는 고난을 그린 비극이다.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이들에게마저 강요되는 냉혹한 폭력과 약육강식의 생존논리, 순수했던 인물이 빠지게 되는 윤리적 딜레마가 강렬한 이미지와 드라마로 축조됐다. 박 감독 본인이 연기한 영화 속 주인공 ‘전승철’은 탈북자였던 후배의 실명에서 가져왔다. 모델이 된 후배는 암으로 영화 완성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개봉(14일) 전 서울 가회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죽지 말고 힘내라고 영화를 찍었는데, 작품이 완성된 것이 승철이가 죽기 이틀 전으로, 암 말기에 복수가 차오르고 모르핀으로 정신없을 때였다”며 “그가 ‘형 작품 못 보게 돼 아쉽고 앞으로도 좋은 영화 찍으리라고 믿는다’는 마지막으로 저에게 남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영화는 그가 저에게 남긴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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