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에 막대처럼 깡마른 몸매, 긴 팔과 다리. 가슴을 울리는 전자음악과 함께 도발적인 시선으로 휘황한 런웨이를 활보하는 여성 모델들의 비주얼은 ‘외계인적’이라고 하리만치 신비로웠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런웨이와 대비되는 자신의 방에서 어둡고 외로운 죽음을 택했다. 지난 18일 저녁, 모델 김유리(22)씨가 서울 삼성동 자신의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20일 부검에서 밝혀질 예정이지만 경찰 관계자는 “(시신 수습 당시) 허벅지가 남자 발목 굵기 정도 밖에 안 되고 골반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말라있었다”고 전했다. 거식증이나 과도한 다이어트에 따른 영양실조에 사인의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왜 이토록 고통스런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케이트 모스부터 시작된 마른 모델 선호…“극심한 ‘몸 스트레스’ 쉽게 안 바뀔 것”=패션계에서는 잇단 죽음에 말을 아끼면서도 그들의 극심한 직업적 스트레스에는 입을 모았다. 모델과의 작업이 잦은 한 패션 홍보대행사 관계자는 “모델에게 몸은 기본이자 모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극심한 체중 조절은 이미 이쪽 업계에 우려스러울 정도로 만연돼 있다”고 공감하면서도 “상황은 금새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해외 브랜드의 경우, 일단 업체에서 가져오는 샘플(모델이나 연예인을 위한 시제품)의 사이즈부터 깡마른 사람도 소화가 힘들 정도로 작다. 다른 업체 관계자는 “일단 키가 크고 말라야 어떤 옷을 입든 이른바 ‘옷빨이’ 잘 받는다는 것은 외면하기 힘든 현실”이라고 말했다. 웬만큼 마르지 않으면 업계 내에서 경쟁은 커녕 생존 자체가 의문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키가 크고 과도하게 마른 모델이 ‘대세’로 자리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다. 패션모델업계의 한 관계자는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가 인기를 얻으면서 작고 마른 몸매에 소녀 같은 얼굴이 패션모델의 전형이 됐고, 이런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면서 “80년대만 해도 나오미 캠벨이나 린다 에반젤리스타처럼 글래머러스한 면을 갖춘 모델이 조명 받았지만 지금은 가슴만 좀 커도 실루엣이 망가지는 시대가 됐다”고 전했다.
▶이어지는 죽음…‘겉보기엔 완벽, 내면은 어둠’=젊은 모델의 죽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8년 김지후, 2009년 김다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지후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한 뒤 전속 계약 무산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드러났고, 김다울은 입지 하락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으로 추정됐다. 지난해 말에는 거식증 경고 캠페인 광고로 유명한 프랑스 모델 이사벨 카로가 급성 호흡기 질환 증세로 숨져 패션계 안팎에 충격파를 던졌다.
이번에 숨을 거둔 김씨는 지난 2007년 슈퍼모델 선발대회로 데뷔했다. 2005년과 2007년에 자신의 미니홈피에 자살을 시사하고 모델로서 체중 관리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과도한 다이어트는 곧잘 거식증으로 이어진다. 거식증 환자는 몸무게가 느는 데에 두려움이 커 음식을 거부하거나 극도로 절제한다. 저체중이 심각해 신체 기능에 이상이 오는 지경에 이르러도 살을 더 빼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지 않는다.
을지대병원 정신과 이창화 교수는 “식사장애 환자들은 자신에 대한 기대 수준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그 기준에 못 미치면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아존중감이 심히 손상된다”고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완벽주의자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감이 없고 우울증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임희윤 기자 @limisglue> imi@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