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결코 산책을 할 수 없는 날씨였다.’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는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도 이런 날씨로 출발한다. 회색빛 하늘, 스산한 바람, 드넓은 평원은 있지만 사람은 없다.
날씨는 같아도 출발점은 다르다. 소설은 숙모의 구박에 시달리는 고아 소녀부터 시간순으로 흐른다. 하지만 영화는 시작도 끝도 아닌 지점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제인 에어가 가정교사로 일하던 손필드 저택에서 뛰쳐나오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캐리 후쿠나가 감독의 영화 ‘제인 에어’는 소설 ‘제인 에어’를 22번째 영상으로 옮긴 작품이다. 수십번 반복됐지만 제인 에어의 매력은 작품마다 오롯이 되살아난다. 숙모의 학대를 받다 쫓겨나듯 자선학교로 들어가 사춘기를 보낸 제인 에어는 자신을 안으로 다듬어 간다. 손필드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간 이후엔 주인 로체스터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키운다. 손필드 저택에 숨은 비밀이 그들의 사랑을 움직인다.
후쿠나와 감독은 제인 에어로 미아 와시코브스카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빼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스토커’로의 변신도 기대되는 이 배우는 여리면서도 강인하고 무심하면서도 섬세한 제인 에어의 감성을 고스란히 몸에 담았다. 창백한 얼굴에 마른 몸은 표정과 몸짓을 최소화한 가운데 격렬하면서도 감정을 억누르는 제인 에어를 표현해냈다.
올해는 원작 소설이 출간된 지 165주년 되는 해. 영화는 샬럿 브론테가 소설에서 묘사한 ‘낙엽진 숲 속’ ‘휘몰아치는 바람’ ‘먹구름과 쏟아지는 비’까지 소설 속 자연뿐 아니라 배경과 사람, 생활상을 그대로 되살렸다.
영화 촬영지는 소설의 실제 배경인 영국 북부 더비셔. 석회암 위에 지어진 거대한 저택 해던 홀이 음침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손필드 저택이 됐다. 21세기엔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었던 것에도 19세기 유럽의 감수성이 스며들었다.
저택엔 고딕풍의 가구를 채웠고 조명 대신 벽난로와 촛불, 기름 랜턴으로 불을 밝혔다. 무엇보다 고전미를 살려낸 대표적인 장치는 의상이다. 재봉틀이 나오기 전인 1830년대였던 만큼 모든 의상을 수작업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도 충실했다.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을 착용한 미아 와시코브스카는 이 의상을 입고 제대로 먹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숨쉬기도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세기 역사에 관심이 많은 캐리 후쿠나가 감독의 고집스러움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마저 충실히 영상에 반영했다. 그는 역사 전문가인 제니 유글로를 초청해 하인들은 언제 밥을 먹는지, 응접실에서는 어떤 게임을 했는지, 일반 가정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었고 대접했는지도 챙겼다. 미아 와시코브스카와 마이클 파스밴더는 19세기 억양을 완성하기 위해 호주, 아일랜드, 요크셔 사람까지 만나 억양 훈련을 받았다.
19세기식 구레나룻에 익숙해지고 가끔 놀라게 해주는 장치마저 즐길 수 있다면, “꿈인 것 같다”고 말하는 로체스터에 “그럼 깨어나세요”라고 답하는 제인 에어가 한층 가까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12세 관람가. 195년 전 샬럿 브론테가 태어난 날인 4월 21일 개봉한다.
윤정현 기자/hit@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