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는 자신이 꼭꼭 숨어도 언론이나 대중들이 찾아나서야 성립될 수 있는 마케팅 기법이다. 방송활동과 언론 노출을 피해 다녔는데 어느새 잊혀져버린다면 그건 신비주의가 먹히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 이 시대 대중스타가 신비주의 마케팅을 구사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가능한 한 노출을 많이 해야 하는 시대다.
서태지는 일차적으로는 음악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활동 초반기인 90년대 초중반에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전략가, 혁명가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2000년 컴백후에는 장르 실험을 계속하다 갈수록 미스터리, 자연, 여행 등을 콘셉트로 한 보다 편안한 음악을 선보였다.
그럼에도 서태지의 마케팅 능력이 탁월함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2000년 컴백후에도 여전히 신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태지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았다. 음악을 하는 서태지와 인간으로서 정현철의 삶을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그런데도 서태지에 대한 관심은 끊이질 않았다. 서태지에 대한 관심이 언론이건 대중이건 잊혀질만하면 서태지라는 의제는 고개를 들고 올라왔다.
그것이 단지 서태지의 음악때문만이었을까.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스타의 모습들은 한가지씩 알려지는 게 일반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서태지는 그렇지 않았다. 2000년 컴백후에는 서태지가 이미 거물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스포츠지에서 1면 기사감이 없으면 연예스타중에서는 가장 먼저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서태지였다.
서태지에 대한 기사는 서태지에게 취재를 해서 쓰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카더라’통신에 바탕을 두고 작성된 것이었다. A지에서 서태지 기사가 나가면 B지에서 물을 먹었다며 또 다른 ‘카더라’ 통신 스타일의 서태지 기사를 쓰는 게 관행처럼 돼있었다.
이처럼 서태지는 음악활동을 하지 않는데도 서태지 관련 기사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서태지는 자신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언론 보도에 대해 한번도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서태지 관련 기사는 꼬리를 물고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자신의 기사에 대한 서태지의 반응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노 코멘트였으니 아무리 많은 기사가 나와도 서태지의 실체에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신비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서태지가 직접 선택한 매체 창구는 MBC밖에 없었다. 1992년 자신의 데뷔곡 ‘난 알아요’를 방송에서 나갈 수 있게 해준 송창의PD(현 소속은 케이블채널 tvN)와 고재형PD(현 소속은 예당 엔터테인먼트)가 근무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2008년 8집 활동에 즈음해 MBC 컴백스페셜을 통해 서태지는 이례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도 했다.
서태지는 갈수록 대중 전체가 아닌, 자신을 지지하는 팬들과만 소통하고 있었다. 팬들에게도 사생활만큼은 보호받고 있었다.
앞으로 서태지가 어떤 전략을 보여줄지가 매우 궁금해졌다. 마지막 신비주의가 벗겨진 만큼 더 많은 것들을 공개할것인지, 아니면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만을 간략히 밝히고 또 다시 침잠할지 서태지가 아닌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서병기 기자/wp@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