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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주세혁 탁구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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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세계선수권에서 1962년 이후 수비전형 선수들이 딴 메달 현황.


#위의 표는 독일의 저널리스트 군터 슈트라우브가 국제탁구연맹(ITTF) 홈페이지에 ‘수비탁구의 역사’라는 시리즈 기사를 게재하면서 수록한 표다. 1961년부터 지금까지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남자단식 최고 성적은 은메달(2회)이다. 특이한 것은 그중 하나가 새천년시대(2001년 이후) 유일한 메달로 기록돼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2003년 파리 세계선수권에서 주세혁(34)의 준우승이다. 이는 올림픽보다 어렵다는 탁구세계선수권 남자단식에서 한국이 거둔 역대 최고 성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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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메이저 국제탁구대회에서 수비수들이 거둔 주요성적. 자료=국제탁구연맹 홈페이지


#이 표도 같은 시리즈 기사에 나온 것이다. 2000년 이후 주요 메이저 국제대회에서 수비전형 선수의 빼어난 성적을 꼽았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세계 탁구를 선도하는 현실에서 아시안게임이 빠진 반면 상대적으로 경기력이 떨어지는 팬암대회나 라틴 아메리카선수권 등이 포함된 것이 좀 싱겁다. 그래도 주세혁 이름이 3회나 나온다. 특히 주세혁은 얼마 전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은메달, 단식 동메달을 획득했다. 위의 두 표를 통해 주세혁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수비수임을 알 수 있다. 2014년 11월 세계랭킹도 수비수 중 으뜸인 12위다(한국 최고).

#탁구의 시작은 원래 수비였다. 테니스든 탁구든 무자비하게 강하게 때리거나, 상대를 속이는 1구를 서브(서비스)라고 하는 것도 이들 스포츠가 상대에게 공을 잘 넘겨주는 것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1901년 런던 로얄 아쿠아리움에서 열린 영국오픈의 우승자도 R. D. 아일링이라는 수비전형선수였다. 당시는 아예 백핸드플레이가 포핸드보다 더 일반적이었다. 점잖게 볼을 넘기기만 해 크리켓에서 넘어온 ‘스톤월러(stonewaller, 득점을 시도하지 않고 오직 위켓을 보호하려고만 하는 지나치게 신중한 타자)’가 이 시대 탁구스타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당시 경기는 무려 175구까지 가는 랠리도 나왔다. 1932년 제6회 세계선수권 남자경기에서는 1점을 얻는 데 1시간이 소요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 대회 남자 단체전 결승은 3일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제7회 대회 여자 단식 결승은 너무 오래 지속됨으로써 시합 무효가 선언되어 선수권자를 공석으로 두기도 했다.

#1937년 제11회 세계선수권 이후 탁구대는 조금 커졌고, 네트가 낮아졌다(17.5cm⇒15.25cm). 공격 탁구를 위해 경기룰 자체를 바꾼 것이다. 이후 세계 탁구의 흐름은 수비와 공격을 결합하는 전형으로 바뀌어 갔다. 그래도 아직은 공격기술이 단순해 유럽중심의 수비탁구가 여전히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1952년 제19차 세계선수권에서 히로에 사토(일본)가 두꺼운 스펀지를 붙인 펜홀드 라켓을 이용하여 강력한 공격력으로 5개의 금메달을 따내면서 공격탁구의 시대가 열렸다. 1950~60년대 일본과 중공(당시의 펜홀드 공격탁구가 탁구역사를 바꿔놓은 것이다. ‘더 이상 셰이크와 커트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 나왔고, 독일의 탁구인 유프 쉴라프는 1954년 세계선수권 후 “탁구의 미래는 공격형 플레이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러버의 발달, 1970년대 공격기술인 드라이브의 진일보로 수비 전형은 점차 세계 정상권에서는 멀어졌다. 심지어 최근에는 포핸드 뿐 아니라 백핸드 공격까지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해 펜홀더 그립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기도 하다.

#2003년 21살의 주세혁(당시 상무)은 세계 탁구계에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그의 등장과 함께 수비 탁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의 김경아도 올림픽 동메달(2004년)로 선전했다. 한국의 두 선수가 다 죽어가던 수비 탁구를 살린 셈이다. 여자보다는 남자의 공격파워가 한층 강한 까닭에 주세혁의 임팩트가 더 컸다. 주세혁은 현대 남자탁구에서 세계랭킹 10위 이내 든 유일한 수비전형 선수였다(2012년 5위가 최고). 주세혁 수비탁구의 비결은 역설적으로 공격에 있다. 그는 한국에서 ‘수비의 달인’, ‘깎신’으로 불리지만 외국에서는 ‘aggressive defender', 즉 '공격적인 수비수'로 불린다. 가공할 하 회전을 구사하는 커트에다가 여차하면 공격수 못지않은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로 반격을 가한다. 가끔은 백핸드 스매싱까지 선보인다. 이런 수비전형은 주세혁이 처음이었다. 지금도 공격수가 주세혁의 포핸드 쪽으로 드라이브 공격을 쉽게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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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로 꼽히는 주세혁이 선수생활의 마지막이 될 새로운 2년을 곧 시작한다.


#이틀 전 주세혁을 만났다. 11점제에 이은 ‘탁구의 2차 혁명’으로 불리는 플라스틱공 시대를 맞아 한국 최고의 탁구선수, 세계 최고의 수비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악전고투중이다. 난치병은 많이 좋아졌으나 “새공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했다. 예전에 비해 스핀이 덜 걸리기 때문이다. 괜한 엄살을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도 주세혁은 가능하면 2016년 리우올림픽까지 선수생활을 계속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리고 수비수에게 불리해진 볼 변화는 두뇌 플레이와 공격력 강화로 뚫어내겠다고 했다.

“저는 금메달은 없지만 은메달과 동메달은 정말 많아요. 2003년 21살의 제가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다면 지금까지 운동할 수 없었을 겁니다. 역설적으로 우승을 못한 덕분에, 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아픔 덕에 더 오랫동안 세계적인 수비전형 선수로 살아남지 않았나 싶습니다.”

#맞다. 수비탁구는 어려운 길이다. 선수는 물론 동호인들도 수비탁구는 꺼린다. 하지만 주세혁은 이 수비탁구로 10년이 넘도록 한국 최고, 세계 톱랭커로 살아왔다. 시대적 특수성을 감안하면 탁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전형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그렇게 평가한다. 지금도 중국선수를 꺾을 수 있는 탁구는 주세혁의 수비탁구라고들 한다. 중국 프로리그가 7년이나 주세혁을 초청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인기가 많다. 그래서 유남규(에쓰오일 감독)처럼 올림픽 단식 우승도 없고, 김택수(대우증권 감독)처럼 아시안게임을 제패하지 않았지만 그를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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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의 경우, 국문보다 영문이 주세혁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하다. 다른 국문 포털사이트의 인물정보를 포함해도 그렇다.


#탁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와 동시대를 사는 것은 탁구팬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흘러간 동영상이 아니라 지난 인천 아시안게임처럼 리얼타임으로 그의 플레이를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2년밖에 남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오는 17일 여수에서는 종합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에서 주세혁은 처음으로 플라스틱 볼에 도전한다. 이쯤이면 시간을 내 관심을 갖고 응원 좀 해도 좋을 듯싶다. [헤럴드스포츠=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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