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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이 남자가 사는 법 - 국내 최대 복싱체육관을 일군 홍성민 대표
*먼저 양해 하나. 스포츠, 구체적으로는 복싱에 대한 인물기사지만 사정상 종교적 색채가 강한 글입니다. 특정종교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면 읽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수도권에 복싱체육관만 8개. 연회원은 1,000명을 훌쩍 넘는다. 요트만 3개가 있을 정도로 나름 돈도 벌었다. 여기에 각종 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양천구생활체육복싱연합회장).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잘 모시는 까닭에 복싱계 평판도 좋다. 한때 '밤세계'에서 일을 했던 까닭에 심지어 건달들도 그의 성공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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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용인대SM복싱클럽 대표. 지금도 일주일에 3회 이상 운동을 하는 까닭에 40이 넘었지만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주인공은 한국 복싱체육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용인대SM복싱클럽의 홍성민 대표(41, 체육관에서 관장으로 불림). 이쯤이면 복싱선수 출신으로 성공한 인생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복싱연맹(KBF 회장 이인경)은 7월 24일 프로테스트를 홍성민 대표의 체육관에서 열었다. 프로복서가 되고 싶은 참가자 80여 명 중 40명이 SM복싱클럽 소속일 정도로 그 비중이 높다.

#젊은 복싱사업가 홍성민의 성공은 진한 사연이 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제2의 문성길’로 불리는 복싱유망주였으나 한때 건달세계에 몸을 담았고, 이후 신앙심에 기초한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묵묵히 성공신화를 써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후배들이 롤모델로 삼고 있고, 심지어 그를 가르쳤던 스승(조영섭 문성길복싱컨설팅 대표)이 “체육관 하나도 운영하기 버거운 상황에서 8개나 운영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배울 게 더 많은 제자”라고 말할 정도로 복싱계에서 귀감이 되고 있다.

#육상선수였던 홍성민은 중학교 때 복싱으로 전향했다. 늦었지만 워낙에 타고난 운동신경이 좋아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복싱명문 용산공고로 진학했고(고 최요삼 선수의 1년 후배), 고교시절 시범경기에서 ‘돌주먹’ 문성길을 다운시켜 ‘제2의 문성길’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국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하며 특기자로 용인대에 들어갔다(93학번). 국가대표는 따 논 당상인, 잘 나가는 복싱 유망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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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홍씨! 북한 국적의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었던 홍창수(일본명 도쿠야마 마사모리)와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홍성민 용인대SM복싱클럽 대표(오른쪽).

#하지만 이내 방황이 시작됐다. 워낙 싸움을 잘했던 까닭에 주먹세계의 유혹이 끊이질 않았고,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잡고 2학년이 되면서 프로로 전향해 세계챔피언에 도전하려고 했으나 마침 한국 프로복싱이 갑자기 최악의 침체기로 접어들면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선택은 뻔했다. 천부적인 싸움실력을 앞세워 '잘나가는 주먹'으로 생활했다. “20대 초반에 일명 ‘각그랜저’나 포텐샤 이런 대형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한달에 수천 만 원씩 벌기도 했죠. 그러니 어린 나이에 정신이 없었고 힘든 운동을 다시 하기도 어려웠죠. 그때 건달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지금 이태원, 영등포 등에서 보스급으로 주먹세계에 몸담고 있어요.”

#술과 유흥, 그리고 주먹. 이런 것들에 찌들며 몇 년을 살다가 군에 입대했다. ‘막군’으로 들어갔고, 워낙 복싱실력이 뛰어난 까닭에 상무(국군체육부대)로 옮기는 것이 추진됐지만 이마저도 운이 닿지 않았다. 운동을 계속할 팔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군생활을 마치고 계속 건달생활을 하게 됐다.

#그런데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신비한 체험을 하나 했다. “안 믿으시겠지만 정말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났어요. 밤에 합숙소에서 자는데 귀신을 본 거예요. 누워 있는데 빨간색 눈을 가진 귀신이 문을 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무섭기도 하고, 헛것을 본 것 같기도 해서 옆에서 자는 친구에게 ‘문 잠갔어?’라고 물었는데 ‘어 잠갔어’라고 답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섬뜩했어요. 친구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이죠. 다시 보니 친구는 그냥 자고 있었어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문을 잠그고 다시 잤죠. 하지만 정말 놀랐고, 좀처럼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어요.”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홍성민은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기도원으로 갔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말에 의하며 ‘예수님을 만났다’. 신의 음성을 들었고, ‘나도 험한 일(십자가 순교)을 당했다. 너도 견디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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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대 SM복싱클럽의 홍보 플래카드를 내건 전용버스.

#이후 홍성민 대표는 주먹세계와는 손을 끊고, 작은아버지의 생수공급 사업을 도왔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져 성실함 그 자체로 삶이 변한 까닭에 사업은 잘됐고, 이 일은 지금도 직원들을 두며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삶이 안정되자 자신의 삶의 근간인 복싱으로 시선이 향했다. 변정일복싱체육관에서 코치를 맡으며 일선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지도자로 경력을 쌓았고, 2005년 용인대SM복싱클럽을 목동에 열었다. 역시 신앙심과 성실함이 몸에 뱄던 까닭에 짧은 시간에 관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 성공가로를 달렸다. 이 무렵 함께 건달생활을 했던 절친한 친구와 관련해 또 믿기 힘든 체험을 하나 했다. 건장했던 친구가 워낙에 술을 많이 먹었기에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병문안을 갔는데 의사에 따르면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고, 설령 살아도 식물인간이라고 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한 번 기회를 더 준다고 했다. 다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더니 의사가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일축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거짓말처럼 3일 만에 퇴원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홍 대표의 체험 덕일까? 이 ‘절친’은 이후 술도 끊고 신앙생활을 하며 성실히 살았다. 1년 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문제는 이 사실에 너무 기뻤던 나머지 이 친구가 4일 연속 술을 퍼마셨고 4일째 밤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이런 체험은 홍성민 관장을 더욱 신앙적으로, 그리고 생활적으로 성실하게 만들었다. 찬양신학대원을 다니며 색소폰, 베이스 등 4가지 악기를 배웠다. 여기에 복싱지도자 자격증은 물론 요트, 보트, 트레일러, 대형면허 등 각종 자격에 도전했다. 각종 ‘증’만 30개가 넘는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3일 이상은 운동하고 있기에 20대만큼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은 약하잖아요. 딴 거(나쁜 거) 안 하려고 무조건 열심히 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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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대표가 직접 제작한 정규링. 조립식으로 이것으로 야외에서 복싱대회를 연다.

#노력의 과실은 생각보다 풍성했다. 현재 수도권에 8개의 용인대SM복싱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2015년 안에 10호점을 낼 계획이다. 사람됨됨이를 우선했기에 코치들도 모두 신앙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 성실한 사람들이다. 사람이 좋으면 홍 관장의 돈으로 체육관을 열어 운영을 맡기고 먹고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2009년 2관을 오픈할 시점이었는데 ‘사람을 붙여주면 2관을 내겠다’고 기도했죠.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주변에 있던 코치들이 달리 보이는 거예요. 사람은 옆에 있었던 것이죠. 제가 몰랐을 뿐이죠. 바로 2관 계약을 했습니다.” 현재 2관과 6관은 역시 복싱을 했던 친동생이 운영하고 있다. 한 번은 한창 체육관이 잘 운영되고 있는데 근처에 수십 억 원을 들인 복싱휘트니스 클럽 2개가 비슷한 시기에 생기기도 했다. 긴장했지만 도리가 없어 기도만 하며 내 할 일만 충실히 했다. 그랬더니 6개월 만에 두 군데 다 망해서 없어졌다. SM복싱클럽 때문에 3억원 씩 적자만 보고 발을 뺀 것이다.

#홍 대표의 마지막 체험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났다. 3관 오픈을 앞둔 2010년께였는데 오른쪽 눈이 아프고, 갈수록 튀어나와 병원에 갔더니 눈 뒤에 계란 크기만 한 종양이 생겼다. 양성이면 제거하면 그만이지만 악성이면 이미 뇌까지 전이될 가능성이 높았고, 설령 제거한다고 해도 다시 자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미 신앙이 탄탄했던 까닭에 마음은 편했다. “다 하나님 뜻에 맡기기로 했죠. 열심히 살았고, 잘못된다고 해도 좋은 곳으로 간다는 믿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기도 끝에 새삼 20년도 넘은 옛날 일이 생각났다. 용산공고 2학년 때 학교 내에서 싸움이 났는데 상대파 대장과 맞짱을 떠 이겼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 대장이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그의 아버지인 특공무술 관장님이 ‘일대일로 정당하게 싸운 것'이라며 용서해줬지만 크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한 전국대회에 결승에서 라이벌에게 졌는데 지는 과정에서 홍 관장도 오른쪽 눈을 맞고 퉁퉁 부은 적이 있었다. “세상 이치가 그런 거 같아요. 인과응보라고 제가 남에게 못된 짓을 했으니 똑같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죠. 제 눈 뒤에서 종양이 자라왔던 겁니다. 다행히도 제가 열심히 산 까닭에 종양은 양성이었고, 수술 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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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자신이 주최한 대회에서 문성길, 박종팔, 최용수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포즈를 취했다.

#“한때는 정말 험하게 살았어요. 싸움 정말 많이 했죠. 목에 칼이 들어오는 협박도 당했고, 자칫 생명을 잃거나 장애를 가질 만한 격한 싸움도 있었습니다. 인생의 고비가 많았는데 잘 넘긴 셈입니다. 지금은 열심히 사니 행복합니다.” 홍성민 대표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관원만 1,000명이 훌쩍 넘는다. 수입도 예전엔 한 달에 1,500만 원이 넘었는데 요즘은 규모가 커지면서 정확히 얼마를 버는지 모른다고 한다. 수입도 많지만 지출도 많기 때문이다. 버스 2대에 보트 3대를 가지고 있다. 프로선수들도 2명을 키우고 있고, 향후 더욱 확대할 생각이다. 경기도 인근에 SM복싱연수원을 만들어 복싱은 물론, 승마와 수상스포츠 같은 레포츠활동을 즐길 수 있는 명소로 만들 계획이다. 그렇다고 홍 관장이 화려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인테리어부터 전단을 돌리는 일까지 웬만하면 스스로 다 한다. 각종 연장값만 2,000만 원이 들었다. 가로세로 7m짜리 정규링까지 제작했다. “제가 운동이나 건달생활을 계속했다면, 즉 제 주먹만 믿고 살았다면 교만해졌을 겁니다. 결코 지금처럼 살 수 없었을 테죠. 신앙 덕분에 이만큼 살 수 있으니 감사하죠.” 홍 대표는 지금도 매일 성경을 타이핑으로 필사를 하고 있다. 이미 한 번을 끝냈고, 두 번째가 진행 중이다. [헤럴드스포츠=유병철 편집장 @ilnam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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