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 복싱체육관만 8개. 연회원은 1,000명을 훌쩍 넘는다. 요트만 3개가 있을 정도로 나름 돈도 벌었다. 여기에 각종 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양천구생활체육복싱연합회장).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잘 모시는 까닭에 복싱계 평판도 좋다. 한때 '밤세계'에서 일을 했던 까닭에 심지어 건달들도 그의 성공을 인정한다.
홍성민 용인대SM복싱클럽 대표. 지금도 일주일에 3회 이상 운동을 하는 까닭에 40이 넘었지만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젊은 복싱사업가 홍성민의 성공은 진한 사연이 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제2의 문성길’로 불리는 복싱유망주였으나 한때 건달세계에 몸을 담았고, 이후 신앙심에 기초한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묵묵히 성공신화를 써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후배들이 롤모델로 삼고 있고, 심지어 그를 가르쳤던 스승(조영섭 문성길복싱컨설팅 대표)이 “체육관 하나도 운영하기 버거운 상황에서 8개나 운영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배울 게 더 많은 제자”라고 말할 정도로 복싱계에서 귀감이 되고 있다.
#육상선수였던 홍성민은 중학교 때 복싱으로 전향했다. 늦었지만 워낙에 타고난 운동신경이 좋아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복싱명문 용산공고로 진학했고(고 최요삼 선수의 1년 후배), 고교시절 시범경기에서 ‘돌주먹’ 문성길을 다운시켜 ‘제2의 문성길’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국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하며 특기자로 용인대에 들어갔다(93학번). 국가대표는 따 논 당상인, 잘 나가는 복싱 유망주였다.
같은 홍씨! 북한 국적의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었던 홍창수(일본명 도쿠야마 마사모리)와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홍성민 용인대SM복싱클럽 대표(오른쪽).
#술과 유흥, 그리고 주먹. 이런 것들에 찌들며 몇 년을 살다가 군에 입대했다. ‘막군’으로 들어갔고, 워낙 복싱실력이 뛰어난 까닭에 상무(국군체육부대)로 옮기는 것이 추진됐지만 이마저도 운이 닿지 않았다. 운동을 계속할 팔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군생활을 마치고 계속 건달생활을 하게 됐다.
#그런데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신비한 체험을 하나 했다. “안 믿으시겠지만 정말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났어요. 밤에 합숙소에서 자는데 귀신을 본 거예요. 누워 있는데 빨간색 눈을 가진 귀신이 문을 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무섭기도 하고, 헛것을 본 것 같기도 해서 옆에서 자는 친구에게 ‘문 잠갔어?’라고 물었는데 ‘어 잠갔어’라고 답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섬뜩했어요. 친구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이죠. 다시 보니 친구는 그냥 자고 있었어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문을 잠그고 다시 잤죠. 하지만 정말 놀랐고, 좀처럼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어요.”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홍성민은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기도원으로 갔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말에 의하며 ‘예수님을 만났다’. 신의 음성을 들었고, ‘나도 험한 일(십자가 순교)을 당했다. 너도 견디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용인대 SM복싱클럽의 홍보 플래카드를 내건 전용버스.
#지도자로 경력을 쌓았고, 2005년 용인대SM복싱클럽을 목동에 열었다. 역시 신앙심과 성실함이 몸에 뱄던 까닭에 짧은 시간에 관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 성공가로를 달렸다. 이 무렵 함께 건달생활을 했던 절친한 친구와 관련해 또 믿기 힘든 체험을 하나 했다. 건장했던 친구가 워낙에 술을 많이 먹었기에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병문안을 갔는데 의사에 따르면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고, 설령 살아도 식물인간이라고 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한 번 기회를 더 준다고 했다. 다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더니 의사가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일축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거짓말처럼 3일 만에 퇴원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홍 대표의 체험 덕일까? 이 ‘절친’은 이후 술도 끊고 신앙생활을 하며 성실히 살았다. 1년 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문제는 이 사실에 너무 기뻤던 나머지 이 친구가 4일 연속 술을 퍼마셨고 4일째 밤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이런 체험은 홍성민 관장을 더욱 신앙적으로, 그리고 생활적으로 성실하게 만들었다. 찬양신학대원을 다니며 색소폰, 베이스 등 4가지 악기를 배웠다. 여기에 복싱지도자 자격증은 물론 요트, 보트, 트레일러, 대형면허 등 각종 자격에 도전했다. 각종 ‘증’만 30개가 넘는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3일 이상은 운동하고 있기에 20대만큼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은 약하잖아요. 딴 거(나쁜 거) 안 하려고 무조건 열심히 산 겁니다.”
홍성민 대표가 직접 제작한 정규링. 조립식으로 이것으로 야외에서 복싱대회를 연다.
#홍 대표의 마지막 체험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났다. 3관 오픈을 앞둔 2010년께였는데 오른쪽 눈이 아프고, 갈수록 튀어나와 병원에 갔더니 눈 뒤에 계란 크기만 한 종양이 생겼다. 양성이면 제거하면 그만이지만 악성이면 이미 뇌까지 전이될 가능성이 높았고, 설령 제거한다고 해도 다시 자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미 신앙이 탄탄했던 까닭에 마음은 편했다. “다 하나님 뜻에 맡기기로 했죠. 열심히 살았고, 잘못된다고 해도 좋은 곳으로 간다는 믿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기도 끝에 새삼 20년도 넘은 옛날 일이 생각났다. 용산공고 2학년 때 학교 내에서 싸움이 났는데 상대파 대장과 맞짱을 떠 이겼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 대장이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그의 아버지인 특공무술 관장님이 ‘일대일로 정당하게 싸운 것'이라며 용서해줬지만 크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한 전국대회에 결승에서 라이벌에게 졌는데 지는 과정에서 홍 관장도 오른쪽 눈을 맞고 퉁퉁 부은 적이 있었다. “세상 이치가 그런 거 같아요. 인과응보라고 제가 남에게 못된 짓을 했으니 똑같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죠. 제 눈 뒤에서 종양이 자라왔던 겁니다. 다행히도 제가 열심히 산 까닭에 종양은 양성이었고, 수술 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홍성민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자신이 주최한 대회에서 문성길, 박종팔, 최용수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포즈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