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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화영이 만난 골프人]한국 골프기자 1호 최영정(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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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의 최영정 옹.


67년부터 보고 느낀 취재의 기억들
평일이면 최영정 옹은 용산구 서계동 집필실에 오전에 지하철로 출근해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91년에 자리를 잡았으니 벌써 24년에 이른다. ‘칼럼 공방(工房)’이라고 하자 “참 좋은 이름이네. 그게 더 어울리는데?”하며 반색한다. 그에게 골프는 평생의 땀과 정성을 쏟은 공장이고 일터다. 22권의 골프 서적은 거기서 나온 결실이자 생산품이다. 그가 골프를 일터로 삼은 계기는 지금부터 48년 전인 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1년 10월 16일,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최영정 옹은 전주고와 전북대 농경과를 졸업하고는 이리공고에서 교사 생활을 3년간 하다가 59년에 조선일보 공채 2기로 입사했다.

“당시 교장하고 사이가 안 좋았고, 친구들도 다 서울에 있었고, 교사로 일생을 마치는 게 당시로는 빤해 보였다. 그래서 신문기자 시험을 보러가게 됐다. 친구 선생에게 수업을 맡겨두고 이리에서 7~8시간 기차타고 와 시험봤다. 400명이 응시했는데 8명이 합격했다.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영어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았다. (조선일보에 23년간 ‘이규태코너’ 칼럼을 연재한 칼럼니스트) 이규태하고 동기다.”

신문기자로 처음 쓴 기사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당시 편집국장은 천관우 씨였다. ‘자네, 한글 표기 자판에 대해 취재하고 원고지 40장으로 써오게’ 이순신 장군 기념일이 되자 국장은 자신의 은사인 서울대 사학과 이병도 박사에게 보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백과사전 찾아 공부해 써냈었다.”

요즘 글을 쓰는 컴퓨터 자판은 당시에는 원고지였다. 골프는 어떻게 취재하게 되었을까? “당시 다른 언론사들은 반(反)골프 정서가 강했다. 어떤 날은 어느 언론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찍어 보도했는데 ‘일 안하고 놀이에 빠져 있다’는 게 기사의 요지였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67년에 방일영 사장, 방우영 전무가 골프에 심취해 있었기에 취재가 가능했다. 방 사장이 ‘체육부에서 골프도 취재해야 한다’고 해 내가 전담하게 됐다. 당시 서울 인근에 골프장이라곤 한양, 뉴코리아, 안양, 태릉, 관악CC 다섯 곳이었으니 이들을 돌아다녔다. 당시 하루 취재비 2~3만원 나왔는데 나는 하루에 200~300km 달리던 신문사의 지프차 운전기사에게 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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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만났던 최 옹은 2000여권의 골프 서적 속에서 형형한 눈매를 간직하고 있었다.


골프장에서 본 권력자들

초창기 5개 골프장을 돌면서 하던 취재란 대체로 아마추어 골퍼들의 모임이나 동정 기사를 발굴하고 캐내는 것이었다. 당시 프로 골프대회는 한국오픈, 한국프로골프선수권 단 두 개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골프 지면을 어떻게든 만들어야 했다.

아마추어 골프 모임이란 친목단체, 예컨대 상공부 출신 모임, 경제기획원 모임, 서울대 졸업 의사 모임 등이었다. 대통령의 골프 에피소드도 주 소재였다. 하지만 사적인 골프 모임을 취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누가 어떻게 골프장에 왔느냐’를 묻는데 순순히 답할 위인은 없다. 취재하는 골퍼에게 항의도 받았다. 골프장도 취재를 거부하곤 했다.

조선일보 사장 명의로 ‘골프 발전을 위한다’는 공문을 보내 취재한 적도 많았다. 또한 일주일마다 얼굴을 보고 자주 취재하러 가면 관계자와는 인간적으로 친해진다. 67년에 처음으로 쓴 골프기사는 무엇이었을까?

“겨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모처럼 만에 서울CC(현재 어린이대공원인 군자리 코스)에서 라운드하고 배다리 막걸리를 시켜 먹었다는 내용이었다. 사진은 물론 못 찍었다. 대통령의 골프 동정 보도가 몇 번 나가니까 대통령 경호실에서 연락이 왔다. 동선이 노출될 수 있으니 너무 자세하게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울CC는 경제, 정부, 군부의 최고 실력자들이 드나들었다. 그 만큼 격변도 많았으리라. 71년에 서울CC가 폐쇄되고 순식간에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뀐 계기가 ‘힘깨나 쓰는 인사들이 몰려다닌다’는 루머 때문이었다는 것도 근거가 있다.

권력자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았다. “서울컨트리에 주차된 고급 차량 운전 기사들이 노름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습격해 잡아가기도 했었지. 김성곤(71년 당시 여당 재정위원장으로 쌍용그룹 창업자) 서울CC 이사장이 박대통령 지시를 어겼다고 서울컨트리에서 라운드 중에 잡혀갔지 않았어. 74년 8월 15일 광복절에 태릉에서 취재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라운드하던 육군 장성들이 막 뛰어 다니더만. 알고 보니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었어.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당시 골프에 대한 정책은 권력 최상층부에서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89년 이전까지 골프장 허가권을 청와대에서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 ‘허정구배’로 불리는 한국아마추어선수권은 74년까지는 ‘대통령배’였는데 이후에 문화공보부를 통해 ‘대통령배가 많으니 트로피를 반납하라’고 했고 이후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트로피를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권력이 골프장을 위협하기도 했다.

“68년에 삼성 그룹 이병철 회장이 만든 안양CC는 자존심이 강했다. 군인들에게 부킹을 잘 안 해줬다. ‘안양골프장 상공에서 낙하산 훈련을 하겠다’니까 골프장 관계자가 찾아가 빈 뒤로는 군 장성의 부킹 사정이 좀 여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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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2일 만난 최옹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으나 집필실은 많이 축소되어 있었다.


김형욱 중정부장의 홀인원
지금이야 골프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지만 당시엔 특종이란 게 있었을까 싶다. 혹시 홀인원 기사를 가장 먼저 쓴 건 언제였나? 재미난 에피소드로 돌아왔다. “서울CC에서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권력을 행사하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제4대 부장, 1963~69년 재임)이 홀인원하는 광경을 직접 봤다. 당시엔 홀인원이 뭔지 모를 때였다. 당시 안면이 있던 터라 김형욱 부장은 그린에 동반자를 모아놓고 나를 불렀다. ‘어이~ 최 차장, 사진 한 방 찍어줘.’ 그렇게 동반자 모아놓고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순간 셔터가 잠기는 느낌이 났다. 회사에 돌아와 보니 ‘아차! 필름을 넣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며칠간을 숨어다녔다. 김형욱이 나를 찾을까봐 말이다.”

초창기 골프 대회를 취재할 때의 보람찬 기억도 있을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회는 어떤 것일까? “69년 5월 29일부터 4일간 서울CC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태평양아마추어골프팀선수권(오늘날의 노무라컵)이다. 7개국에서 네 명씩 출전했는데 중국이 891타로 우승했고 한국은 김영창, 김동식, 허광수(현재 대한골프협회장), 이승호가 나와 934타로 5위에 그쳤다. 그때 가장 잘 친 사람은 김영창 씨였다.” 이 대회는 이후 83년과 2009년에 남서울CC에서 두 번을 개최했다. 국내에서 개최한 최초의 국제 대회였다.

최영정 옹은 국내 최초의 골프기자였던 만큼 골프도 일찍 시작했다. 친형이 극진 가라데를 창시한 최배달 선생인 만큼 집안 자체가 강골이고 운동에도 뛰어났다. 한창 때의 핸디캡은 10이었고, 85년에는 호주 시드니에서 홀인원을 직접 하기도 했다.

골프 기자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를 라운드 하며 취재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82년과 94년 두 번이다. “영국에서 신문 관계된 협회에서 주최한 국제신문인협회가 열렸지. 런던에서 행사를 마치고 혼자 비행기 타고 에딘버러로 갔어. 거기서 혼자 라운드하며 88타를 친 기억이 나. 1파운드에 부킹이 가능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골프가 붐을 이룰 때가 아니었거든. 18번 홀 페어웨이 중간 스윌컨 브릿지에 앉아 사진을 찍었어. 마침 가져간 자동 카메라로 촬영했지. 10초 뒤에 찍히도록 하고 셔터 누른 뒤에 뛰어가서 급히 포즈 취하고 찍은 사진이 지금 액자로 남았어.”

59년에 입사한 <조선일보>에서 최 옹은 75년까지 16년간 신문사에서 일했다. 67년에 골프 취재를 시작해, 72년에 체육부장, 사업국장까지 맡았다. 퇴직 후 76년에는 신문협회 사무국장, 신문잉크 사장을 역임했다. 기자 생활을 그만 두고도 6~7군데에 골프 관련 칼럼을 꾸준히 썼다. 기업체 사보와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국경제신문, 세계일보 등이었다. 이후로도 책을 쓰고 잡지에 칼럼을 쓰는 일을 쉬지 않았다. 끊임없이 그의 글은 수요가 있었다. 골프 단행본을 22권이나 발간한 건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필요하다.

자강불식(自强不息). 스스로 힘쓰면서도 쉬지 않고 단련하는 자세는 그가 아직도 현역 칼럼니스트 일 수 있는 이유다. 인터넷 정보가 세상에 범람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한국 선수들이 우승 스토리를 써내고 있는 오늘날에는 어떤 골프 기사를 써야 할까?

“취재는 자료 수집이 중요하다. 그러면 절반은 써놓은 거다. 간단히 메모한 종이도 쉽게 버리지 마라. 그리고 남들이 쓰기 어려워하는 기사를 써야 한다. 아마추어 골퍼의 아픈 데,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글이 필요하다.” 84세 노인의 목소리는 아직도 우렁차다. [헤럴드스포츠=남화영 기자]

-3편에서 친형인 최배달 선생에 대한 기억과 한국 골프에 대한 최영정 옹의 촌철살인의 의견이 이어집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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