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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의 50가지 비밀] 골프 600년사의 원조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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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초창기 골프하는 귀족들 그림.


600년 골프사의 기원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북해를 타고 서쪽으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언제나 차갑고 암울했다. 그 바람은 바닷가를 넘고 모래 백사장 대신 형성되어 있는 짧은 이끼 모양의 잡초 지대를 지나 언덕 위 초원으로 불어오곤 했다. 초원에서 방목되는 양들은 흐린 날이 많건 바람이 불건 아랑곳 않고 늘 풀을 뜯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양치는 목동인 헨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바람을 맞으며 양들을 몰고 있었다.

14세기의 스코틀랜드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잉글랜드와의 싸움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야 하는 어둡고 캄캄했던 중세 시절이었다. 목동 헨리가 해야 했던 일이라곤 11, 12살이 되면 싸움터에 나가던가, 아니면 감옥보다 더 속박되는 수도원에서 주교들의 시중을 들며 평생 갇혀 사는 일뿐이었다.

목동 헨리가 고안한 게임
모처럼 청명한 어느 봄날 오후, 늘 하던 대로 양을 몰고 초원에 나온 헨리는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동안 소일거리를 찾고 싶었다. 그의 눈앞에서 멀찌감치 토끼들이 굴을 파고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옆으로는 양떼들이 지나가서 편편해진 초원도 눈에 들어왔다.

헨리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근처에서 끝이 구부러진 나무 막대기를 찾았다. 때리기 편한 둥근 돌도 몇 개 주웠다. 편편한 잔디 위에 서서 헨리는 둥근 돌을 앞에다 놓고 방금 주운 막대기로 후려쳤다. 돌은 그러나 많이 날아가지를 못한 채 불과 20여 미터 정도 되는 앞에 떨어졌다. 헨리는 다시 돌을 후려쳤다. 그렇게 여러 차례 돌을 때리자 조금 전 토끼가 만들어 놓고 숨은 반반하게 다져진 잔디 위까지 갈 수 있었다.

뭔가가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료하게 풀피리만 불며 보내던 다소 지루한 하루의 연속이었는데 뭔가 할 거리를 찾은 것 같았다. 처음 출발 했던 지점으로 돌아가서 재차 시도를 해보았다. 반복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승부욕이 살아났다. 적게 치면서 더 멀리 보내고 싶었고 더 빨리 토끼 굴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상인들은 항구의 이끼 낀 모래사장이나 인근 초원에서 삼삼오오 모여 공을 때리는 놀이를 했다. 모래를 5센티미터 정도 쌓아 올린 뒤 그 위에다 둥근 자갈이나 가죽으로 만든 공을 올려놓고 때리는 놀이였다. 일부는 사방에 금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상대방의 막대기를 향해 공을 치기도 했다. 겨울이면 세인트 앤드루스 바닷가의 이끼가 낀 빙판 위에서도 그들은 막대기를 얼음 구멍에다 세워놓고 서너 명이 함께 비슷한 놀이를 하곤 했다.

헨리가 혼자 했던 놀이는 그러나 그들이 하던 것과는 달랐다. 전에도 인근 목동들과 바닷가에서 이따금씩 모래판의 자갈을 후려치는 놀이는 해오던 터였지만 그것은 한 번씩 때리고는 떨어진 거리를 재서 멀리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목동들이 하는 놀이는 바닷가라는 장소는 같았지만 방식에 있어서는 조금 달랐다. 상인들은 빙판이나 땅에다 좁은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서 말뚝을 맞추는 놀이를 했지만 목동들은 멀리 가는 거리를 재는 놀이였다.

헨리가 초원에서 했던 동작은 기존의 놀이에서 한걸음 더 나간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둔덕이 있는 언덕 위에서 자갈을 때린 방향은 아래쪽 양들이 노는 초원, 즉 페어웨이(Fairway)였다. 당시 페어웨이의 의미는 ‘편편하게 놓인 잘 만들어진 초원’이나 혹은 ‘물살이 없이 멀리까지 잔잔하게 퍼져있는 항해길’을 뜻하기도 했다. 편편한 페어웨이를 향해 날아간 돌은 그 다음에 더욱 편편하고 잘 다져진 그린(Green)에 도달했으며 토끼가 만들어 놓은 홀이라는 목표물에 집어넣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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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금지령을 내렸다는 제임스 2세 영국왕의 초상.


처음과는 달리 하면 할수록 쉬워질 줄 알았지만 뭉툭한 돌이 생각대로 쉽게 맞지는 않았고 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앞에 펼쳐진 페어웨이로만 돌이 날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바닷가 쪽의 갈대숲으로 휘어져 들어가는가 하면, 덤불속으로도 들어가곤 했다. 재차 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우 10여 차례 만에 그린 근처에 도달했고 거기에서도 서너 번 만에 굴속에 돌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치는 타수를 줄일 수만 있다면…’ 헨리는 휘두르는 횟수를 줄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재미를 붙인 그는 막대기로 돌을 날려 버리는 놀이로 해가 지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한적한 봄날의 오후는 새로운 놀이를 고안해 내는 것으로 그렇게 하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에딘버러의 목동들은 이제 심심하지 않아도 됐다. 양을 치며 따분히 보내기는커녕 어서 빨리 아침이 밝아 양들을 데리고 초원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들이 났다. 어떻게 하루가 흐르고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매일같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데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들의 돌 때리는 놀이는 인근 어부와 주민들에게도 알려졌고, 훗날 어른들을 통해 주위로 퍼져나갔다.

스코틀랜드의 골프 기원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어두웠던 중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골프라는 운동은 그렇게 태동했다. 헨리가 살던 14세기의 스코틀랜드 어원에는 영어가 아닌 게일어로 ‘치다’라는 뜻의 ‘고프(Gouft)’가 있었고, 공은 ‘볼(Ball)’이라 불렸다. 헨리가 몰던 양들이 지나가서 편편해진 초원은 페어웨이 즉 안전한 바다의 뱃길이고 토끼가 다니면서 다져놓은 자그만 지역을 ‘그린’이라 불렀으며, ‘홀(Rabbit Hole)’은 토끼가 숨던 굴을 의미했다.

‘골프의 기원은 언제부터였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어느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15세기 어느 봄날 스코틀랜드의 초원에서 목동들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정설로 여겨진다. 세상의 여러 스포츠들이 규칙에 의해 탄생되어졌지만 골프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유일한 스포츠다. 그리고 300여년 후에야 규칙이 제정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네덜란드와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골프의 기원을 주장하지만 많은 증거들이 스코틀랜드 발생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는 1457년에 발견된 의회의 ‘골프 금지령’이다. 당시 왕이었던 제임스 2세는 영국과의 내전에서 궁수들이 훈련은 하지 않고, 너나없이 골프에만 매달리자 스코틀랜드 전역에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골프를 즐겼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골프는 스코틀랜드에 의해 시작되어졌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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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빙판 위에서 즐기던 콜벤.


정설 이외에도 골프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가설도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네덜란드 기원설이다. 그렇다면 네덜란드 기원설은 어떤 정황에 근거하는가? 미셀이라는 골프학자가 저술한 <골프의 역사>를 인용하자면 16세기 네덜란드의 겨울 풍경화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습이 있다. 빙판에서 삼삼오오 모여 골프채 같은 막대기를 들고 10여 미터 앞에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표적을 맞추는 광경이다. 이를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콜프(Kolf), 혹은 콜벤(Kolven)이라 불렀다.

목표물을 맞춰 누가 적은 타수로 맞추거나 혹은 근접거리를 계산해서 승패를 가르는 놀이였다. 어린이들이 집안에서 문고리를 표적으로 역시 근접거리를 계산하는 놀이였다. 어른들은 주로 성당의 뒷마당이나 넓은 뜰에서 네모로 금을 그은 다음, 그 안에서 목표물을 맞히는 놀이를 했다.

마크 앤 스펜서(Mark & Spencer)가 공동 저술한 <골프의 역사>에서도 ‘네덜란드는 빙상이나 실내 이외에 필드에서도 역시 골프 비슷한 놀이를 즐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마무리는 홀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부엌이나 성채, 혹은 법원 등지의 정문이 목표물이었다. 교회 마당에서 공동묘지에 이르기까지, 혹은 동네 어귀의 목표물 등이 그들에게는 코스로 이용됐다. 게임이 끝나면 진 팀이 이긴 팀에게 맥주통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면서 마을에서 유리창을 파손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여름에는 마을이나 들판에서, 겨울에는 얼음판으로 장소를 바꿔 놀이를 하곤 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스티븐 반 헤겔(Steven J.H. Heigel)은 1972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인 <고대의 골프(Early Golf)>에서 ‘1297년 12월26일 북부 지방의 레오넨 베트 마을에 4홀 골프 코스가 만들어졌으며, 총 연장이 4,500야드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게임은 목표물은 비석이나 현관 등이었으며 적은 타수로 그것을 맞히는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스티븐은 ‘당시 이 놀이는 네덜란드어로 콜프(Colf)로 불렸는데 클럽(Club)이라는 뜻이었고, 역시 네덜란드 어로 클럽으로 하는 경기(Game with Club Spelmetten Kolve)를 의미했다’고 주장한다. 언어학적으로 두 나라간 교류가 있으면서 네덜란드에서는 처음에는 촐레(Chole)로 불리다가 이어 필드에서는 코스펠(Kofspelfh), 빙상에서는 콜벤(Kolven)으로 불렸다는 것. 콜프(Kolf)는 실내에서 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반면 스코틀랜드 지방에서는 고프(Gouft), 골페(Golfe)등으로 또 남쪽 잉글랜드에서는 고프(Gowf) 등으로 불렸는데 두 나라 간에 상호 작용이 없었다면 언어학적으로 이렇게 비슷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놀이는 18세기까지 이어져오면서 어느 시기에 공은 야구공 만하게 커졌으며, 코스의 길이도 수천 야드에서 갑자기 짧아진 25야드, 즉 10미터 내외의 놀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2세기 경 네덜란드는 스코틀랜드 보다 강국이어서 무역상들이 스코틀랜드의 동부 해안 지방에서 한두 달이건 머무는 동안 자연스레 그 놀이를 즐겼고, 반대로 네덜란드 상인들은 클럽을 만들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질 좋은 나무를 네덜란드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학자의 이런 주장은 그러나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명이 모두 16세기 네덜란드의 겨울 풍경화에 있기 때문에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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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당나라 시대부터 즐겼다는 추이환 그림.


중국 학자들에 의한 중국 기원설도 심심치 않게 제기된다. 서기 700년 경에 당나라에서 시작돼 송나라를 거쳐 명나라까지 전래되면서 궁궐 내에서 아낙네들이 마당에서 즐긴 놀이를 가리킨다. 중국인들은 이 놀이를 ‘추이환(推丸)’이라 불렀으며 <환경(丸經)>이라는 규칙이 적힌 책자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책자에 따르면 평지는 평(平), 비탈은 요철(凹凸), OB는 외(外) 등으로 불렀고, 나무로 만든 공은 권, 클럽은 구봉, 그리고 티샷은 초봉, 두 번째 샷은 이봉, 한 홀은 파 3이고 버디는 일주, 홀인원은 이주, 무승부이면 다음날 재경기를 했다고 한다.

중국의 이 같은 주장은 그러나 증빙 자료 없이 훗날에 비슷하게 만들어 붙일 수도 있으므로 설득력이 없으며, 그 놀이가 유럽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티벳 고원과 험준한 히말라야를 넘는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존했어야 하는데,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증이 필요하다.

네덜란드가 혹시 골프와 비슷한 놀이를 먼저 만들었다고 해도, 골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스코틀랜드의 목동들에는 비할 수가 없다. 스코틀랜드의 바다와 바람, 목초지, 언덕, 링크스 등 자연 조건은 골프를 발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천혜의 자연 조건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골프를 갈고 닦으면서 오늘날의 골프로 발전시켰다. 후세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의 이 같은 지대한 노력에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그렇게 골프는 스코틀랜드에서 600년 이상을 진화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인세(골프 앤티크 전문가,남양주골프박물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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