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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9) 70년대는 선수로, 그 이후는 지도자로 - ‘복싱계의 손자병법’ 황철순
뉴질랜드에서는 양털을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깎는다고 합니다. 북반구와 기후가 정반대인 것처럼 사고방식 또한 정반대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겨울을 준비해 먹이를 모으고 살을 찌우는 것을 생각한다면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양털을 자라게 해야 할 듯한데 오히려 털을 깎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털을 깎이지 않는 양은 별로 춥지 않아 게으름을 피우지만 털이 깎인 양들은 추위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뛰어다니게 되고 그러다 보면 더 건강해진다는 이유입니다.

오늘은 1980년대 아마추어 복싱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황철순(남산공전-동국대)의 스토리를 풀어볼까 합니다. 황철순은 1954년 산악인 엄홍길 씨의 고향인 경남 고성 태생으로 유복한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글자 그대로 금지옥엽처럼 키워졌습니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문 유복한 어린 시절이었죠. 아버지 사업 차 서울로 상경한 황철순은 서울 배명중학교를 다닐 때 야구선수를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집 근처의 동서울체육관에 입관해 복싱으로 방향전환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만만치 않은 반대에 부딪혔고, 이에 정상적으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부침이 심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시험에도 탈락하고 1970년 일반부 선수로 서울신인대회 코크급 45kg급으로 출전했지만 2회전에서 보기 좋게 탈락하는 시련을 맛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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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기'라고 불릴 정도로 날렵했던 황철순


복싱계의 손자병법


여담이지만 후에 황철순은 ‘복싱계의 손자병법’이라 불릴 정도로 박학다식으로 유명했습니다. 이에 필자는 황 관장의 고교입시 실패에 대해 ‘1982년 서울대학교에 수석 입학한 원희룡(64년생, 현 제주도지사)씨도 운전면허 시험을 3수만에 간신히 합격했다“고 농을 하고, 황 관장도 큰 웃음으로 화답한 적이 있습니다.

황철순은 이듬해 복싱전문학교인 남산공전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복싱연마에 들어갑니다. 그때 스승은 국가대표 출신의 신현옥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물을 만난 황철순은 1972년 남산공전 2학년 때 전국체전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전국무대에 화려하게 신고합니다. 이어 1973년에 열린 테헤란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황철순은 복싱역사에 남을 대이변을 만들어냅니다. 당시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였던 김충배(명지대)를 스트레이트 연타로 무너뜨리고 고교생 국가대표가 된 것이죠.

김충배(45년 서울생,영등포체육관 사범 홍순만)는 158cm의 작은 키였지만 복서형 파이터로 수준 높은 테크닉을 지녔던 선수였습니다. 김승미 신춘교와 함께 대학 최강 명지대를 이끈 부동의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김충배는 황철순에게 패하고 곧바로 은퇴를 선언하고 천안으로 내려가 청운실고, 예덕실고(예산)에서 교편을 잡고 코치인 김호길(53년생, 현재 캐나다 토론토 거주) 씨와 함께 듀엣을 이루어 국가대표 송창호, 송광식(동아대) 백승영(용인대) 김찬수(현 KBF 심판) 유장현(동국대)을 배출했고, ‘동양 웰터급의 쿠에바스’로 불리며 프로에서 한 획을 그었던 박정오도 만들어냈습니다.

고교생 국가대표

고교생으로 당대 최고의 복서를 꺽은 황철순은 그해 아시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도 테헤란 아시안게임 플라이급에서 물 익은 기량을 기량을 과시하며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마지막 순간 그 유명한 구영조(북한)에게 패하고 맙니다. 황철순은 글러브를 낀 이래 그렇게 많은 펀치를 허용한 적은 처음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구영조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밴텀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북한의 복싱영웅입니다.

황철순은 밴텀급으로 체급을 올려 기존 강자인 박인규 임병진 등을 제치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합니다. 이때 황철순은 대한체육회장이었던 김택수(26년생, 경남 김해생, 서울대 법대 졸업) 씨로부터 매월 30만 원씩 후원을 받을 정도로 ‘모두가 인정하는 한국의 간판복서’였습니다(김택수 회장은 황철순의 부친께서 올림픽 출전 병적 확인서를 발급받으러 병무청에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직접 빈소를 방문하여 울고 있는 황철순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제부터 내가 너의 양부 노릇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체육계의 거물이었던 김택수 회장이 1983년도 57세에 타계하신 것은 스포츠계의 커다란 손실이었습니다. 고생근 씨의 회고에 의하면 이 분은 프로경기장 링사이드에서 관람할 정도로 복싱을 굉장히 사랑했던 분이었급니다. 이런 성원 덕분인지 황철순은 몬트리올 올림픽 16강전(밴텀급)에서 1972년 뮌헨올림픽 밴텀급 금메달리스트 마르티네스(쿠바)를 꺾는 기염을 토합니다. 마르티네스는 72년 올림픽 결승에서 멕시코의 알폰스 자모라(후에 홍수환 선수를 꺾고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 등극)를 제압한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를 꺾자 황철순의 고성군 생가에는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몰려와 스포트라이트를 터뜨리는 등 축제 분위기가 연출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철순은 그 다음 경기에서 미국의 찰스 무니를 상대로 비교적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2대 3으로 판정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훗날 황철순은 미국과 접경 지역인 캐나다 몬트리올에서의 경기는 사실상 적지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하면서 상당한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같은 날 또 한 명의 금메달 후보였던 박찬희(57년 대구생)도 쿠바의 에르난데스에게 2대 3로 패하면서 그날 한국팀 숙소는 통곡의 방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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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쿠바의 마르티네스를 꺾은 황철순.


배구스타 정순옥과 백년가약


한 가지 아이러니 한 것은 황철순과 연인관계였던 당시 배구 국가대표 정순옥(도로공사)은 조혜정 심순옥 유경화 변경자 등과 함께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올림픽 메달(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는 사실입니다(참고로 올림픽 동메달 연금은 매달 53만 원이며, 아시안게임 2연패도 동장연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액수는 30만 원입니다.) 이 두 사람은 1979년 5월 26일 서울 엠버서더 호텔에서 백년가약을 맺으며 스포츠스타 부부가 탄생했습니다.

1977년 황철순은 그해 창단된 한국화약 복싱부에 입단합니다. 당시 한화그룹 회장은 김종회 씨였는데 그분의 아들로 후에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와 결혼한 김호연(1955년생) 씨가 김성은(66, 70년 아시안게임 페더급 2연패) 관장이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운동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복싱부가 창단된 것입니다. 감독은 당연히 김성은(43년 제주생, 작고) 씨가 맡았습니다. 김호연 씨가 친형인 김승연(현 한화회장) 씨와 아버지 김종회 회장에게 부탁한 것이죠. 한화는 향후 김승연 회장이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에 취임(1982년 3월 12일)하여 오랫동안 연맹 살림을 책임지는 등 복싱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얻은 황철순은 운동에만 매진하게 됩니다. 1977년 10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준결승에서 북한의 정조웅을 물리치며 금메달을 땄습니다. 정조웅은 1982년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라이트급 결승에서 한국의 권현규를 꺾고 우승한 강자였습니다. 그해 겨울 황철순은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으면서 복서로 최고의 절정기에 구가합니다. 당시는 남북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관계라 남북대결에서의 승리는 황철순의 가치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습니다.

이번엔 고교생 돌풍의 희생양

그러나 황철순은 1978년도 3월 세계선수권 국내 선발전 준결승에서 생각지도 않은 고교생 곽동성(58년생, 군산제일고)에게 한 차례 다운을 내주며 판정패를 당해 체면을 구깁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이변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곽동성은 전남체고의 김동길(나중에 82, 86아시안게임 2연패)에게 복싱 입문 이래 최초의 1패를 안겼을 뿐만 아니라 충북 출신의 박광천(충북 체고 교사, 대한복싱연맹 심판위원)이라는 우수한 복서도 꺾을 정도로 스피드와 순발력이 뛰어났습니다. 당시도 이미 전국체전을 비롯, 가장 권위 있는 김명복박사배대회 등을 싹쓸이할 정도로 탁월한 복서였습니다. 냉정히 판단해 보면 충분히 황철순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철순은 하늘 높은 줄만 알았지 땅 넓은 줄을 모르고 방심하다가 회심의 일격을 당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참고로 김동길(61년생, 전남 담양)은 국내선수에게 은퇴할 때까지 단 3패를 기록했는데 나머지 2패는 김인창(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정용범(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단 두 명이었습니다. 김동길은 곽동성에게 패하고 그 이듬해 페더급으로 월장해 국가대표 황정한을 꺾고 대표선수가 된 이래 라이트급, 라이트 웰터급, 웰터급 까지 무려 4체급에 걸쳐 국가대표를 역임하는 대기록을 세웠죠. 반면 곽동성은 원광대로 진학했지만 군산 스승과 익산 원광대학교 감독과의 미묘한 갈등 때문에 편안하게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이 되지않자 79년 전국체전에서 박기철(전남체고)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이정표를 남기고 참으로 아쉽게 링을 떠났습니다. 현재 군산남중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대한복싱연맹 심판위원).

어쨌든 황철순은 곽동성에게 패하며 1973년도 김영구라는 선수에게 다운을 당한 이래 무려 5년 만에 다운을 허용했고, 결국 판정으로 패하는 아마복싱 사상 최대 이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5년 전 고교생으로 아시안게임 우승자 김충배를 꺾었던 기적이 역으로 연출된 것이죠. 이 여파로 그해 4월에 받을 예정이던 대한민국 체육대상이 1977년 니카라과 세계 월드컵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이선희(육군)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 당시 이선희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납니다. 본인은 황철순이 받을 줄 알고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국내 대회에서 고교생(곽동성)에게 패하면서 이미지가 실추되어 대상의 향방이 뜻하지 않게 본인에게 돌아왔다고 소감을 피력했죠. 그만큼 당시 패배는 1패 이상의 커다란 충격과 상심으로 황철순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겁니다. 이와 관련해 1983년 필자가 왕십리에 있는 한국화약 체육관에서 상비군 합숙훈련을 하게 되면서 처음 상면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관장이었던 황철순은 필자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군산이라고 답하자 순간적으로 곽동성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는지 바퀴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네가 곽동성 후배구나’라고 말했습니다.

황철순과 곽동성은 그해 아시안게임 선발전 준결승에서 또 다시 맞붙었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팽팽한 접전 끝에 3대 2로 황철순이 승리했습니다. 결승에서 황철순은 78년 유고 베오그라드 세계선수권 동메달리스트인 김정철(동국대)을 5대0 판정으로 꺾었습니다. 그리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밴텀급에서 자랑스럽게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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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도 3월 고교생 곽동성에게 녹다운을 당하는 황철순.


1970년대 최고의 아마복서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 당시 한국체대 1학년으로, 황철순과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였던 황충재(58년 광양생)는 당시 선배들과 트러블 때문에 학교 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아시안게임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이듬해인 79년 황철순의 도움으로 동국대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는 과정을 밟고 곧바로 프로행을 선언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복싱계를 대표하는 황 씨들은 모두 다 창원 황씨라는 점입니다. 황철순, 황충재, 황동룡, 황준석, 황복수 등 한국을 대표하는 황씨복서들은 전부 본이 창원입니다. 하다못해 홍수환의 모친인 황농선 여사도 창원 황씨입니다. 단지 국가대표 출신의 페더급 동양 챔피언을 역임했던 황정한 만 장수 황씨였습니다. 황희 정승으로 대변되는 장수 황씨는 전형적인 문관출신이라 복서출신이 많이 없는건가요? 참고로 황씨 중에서 장수 황씨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답니다.

황철순은 1979년 10월 제1회 월드컵 복싱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하여 미국의 재키 비어드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판정패를 당하고 은메달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당당히 선발된 황철순은 80년 제3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경기와 제6회 킹스컵 복싱대회에서 밴텀급 우승과 함께 연달아 최우수 복서로 선정되는 등 최절정의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한국이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황철순의 176전에 빛나는 아마추어 생활도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황철순은 이후 프로로 전향해 5전 전승을 거두었지만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고, 1983년 모교인 리라공고의 복싱부 창단감독으로 선임됐습니다. 그리고 이후는 선수 때보다 더 화려한 명지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리라공고에서 후에 세계챔피언이 되는 변정일(66년 태안생) 조인주(69년 담양생),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이창환(70년 화순생)을 비롯해 권채오 김진호 박기홍 박찬목 이훈(현 국군 체육부대 복싱 감독) 등 수많은 우수선수를 양성했습니다. 또 서울시청 감독을 맡은 후로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김기석(현 영주 동양대학 복싱감독)과 2011년 제11회 세계선수권 라이트플라이급 준우승자 신종훈, 그리고 2012년 런던 올림픽 라이트급 은메달리스트 한순철 등 굵직굵직한 대어들을 길러내는 등 명조련사의 면모를 십분 발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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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앙연맹 심판으로 재직 중인 곽동성.


최고의 복싱지도자


필자는 황철순이라는 사람을 우리나라 복싱계 최고의 지도자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마추어 시절 닮고 싶었던 롤모델이기도 합니다. 선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그리고 뜨거운 열정, 폭 넓은 인간관계 등 삼박자를 고루 갖춘 명지도자였습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트레이너로 발탁되어 채성배 이창환 두 선수를 금메달리스트로 조련하는 등 지도력만큼은 모든 이가 인정합니다.

사실 그 분 때문에 개인적인 시련도 있었습니다. 1989년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필자가 이끄는 용산공고의 최요삼이 당시 리라공고 황철순 감독이 이끄는 이근식(72년생 한국체대 졸)에게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패할 때 필자의 두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지도력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무언으로 가르쳐준 분이 황철순이었습니다(그 이듬해인 90년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똑같은 경기내용이 펼쳐졌지만 결과는 최요삼이 설욕에 성공했고 우승과 함께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당시 182명의 심판들의 출신과 성향 그리고 생년월일 등 심판들의 인적사항을 사법고시 공부하듯 파악하였고 해마다 연말이면 심판진들에게 연하장을 보내고 애경사에 참석하면서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 필자의 선수들이 피해보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당시 링에 올라가면 한 분의 주심과 다섯 분의 심판까지 여섯 분을 먼저 한번 쓱 훑어보고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작전을 지시하곤 했습니다.

황 관장과는 필자가 1989년도부터 94년까지 용산공고 코치로 재직할 때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997년도 서울체고로 적을 옮긴 후에도 시즌2 대결을 벌였습니다. 11년 동안 전우애로 맺어진 스승 같은 선배입니다. 제게는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안겨준 분이죠. 황철순은 한마디로 ‘복싱계의 마키아벨리’였지만 양보할 때 양보할 줄도 아는 미덕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황철순이 제게 염동균과의 스파링을 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링 중앙을 빙빙 돌다가 황철순이 전광석화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를 먼저 가격하자 한참 후에 염동균(50년 옥천생,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의 라이트 훅이 날아왔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더군요. 그만큼 자신이 빨랐다는 이야기죠. 그러면서 “영섭아 내가 문성길하고 경기하면 누가 이길 거 같니?”라며 난처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기지를 발휘해 “그날 컨디션이 승부의 향방을 좌우하지 않을까요?”라고 답하자 황 관장은 “아니야, 나는 문성길만큼은 자신 있어. 나는 문성길의 펀치의 궤적이라든지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묘수가 있어”라고 설명했습니다. 오히려 자신 같은 스타일은 허영모처럼 스피드를 겸비한 테크니션에게 역으로 패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복싱계의 손자병법의 솔직한 평가인 까닭에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황 관장이 걸어온 32년 지도자인생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화려하다 못해 눈부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복싱 사상 가장 많은 종합 우승과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했던 군계일학 같은 존재임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황철순 관장은 몸이 좋지 않아서 자주 병원을 다닌다고 합니다. 그는 호탕하고 화끈함이 넘치는 남자다운 성격이라 제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선배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가끔씩 통화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 감출 수가 없습니다. 빨리 쾌차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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