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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승진의 복싱이야기] 고 김정희 선수의 링사고는 막을 수 없었나?(사인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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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7일 대한복싱협회 주최로 충남 청양에서 열린 '제48회 전국복싱우승권대회' 고등부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는 고 김정희 선수. 김 선수는 경기 후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33일 만인 지난달 9일 끝내 숨을 거뒀다. [사진=뉴시스]


주제넘게 칼럼을 쓸 정도로 복싱을 사랑하지만, 쓴소리를 한번 해야겠습니다. 복싱 경기 후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지난 10월 9일 끝내 운명을 달리하는 고 김정희 선수(16·수원 영생고 1년) 때문입니다.

자식을 둔 아버지로서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사고입니다. 복싱인의 한 사람으로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철저한 원인분석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이 고인에 대한 도리인 것 같아 무겁게 펜을 들었습니다.

김정희 선수의 경기 동영상을 수십 번 반복해 봤습니다. 그리고 경막하출혈 CT사진을 구해 이것도 면밀히 살폈습니다. 링사이드에서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도 사인분석은 충분했습니다.

먼저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복싱과 같은 격렬한 격투기 경기의 특징상 선수나 세컨, 심판까지 경기 중에는 흥분상태인 까닭에 사고의 징후를 못 보고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저도 날마다 복싱을 수련하는 까닭에 잘 압니다. 시합을 뛰는 복서라면 모두 링 위에서 심하게 맞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뇌출혈 부상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심하게 맞았을 때 스스로 ‘괜찮다’고 쉽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입니다.

복서는 링 위에서 자신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성격이나 버릇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뇌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가 머리에 큰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어갈 때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신체적 사인(징후)이 나옵니다. 이건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링 위에서 격렬한 스파링을 해보았기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모든 복서들은 강한 펀치를 맞으면 약간의 뇌진탕과 함께 유포리아(euphoria, 다행증 혹은 행복감)를 느낍니다. 쉽게 말해 약간 술 취한 사람처럼 되는 겁니다.

이때 복서는 내가 맞은 것보다 때린 기억이 더 뚜렷합니다. 펀치에 맞는 통증은 둔통(鈍痛, dull pain, 둔한 느낌의 통증)이 됩니다. 인체 생리상 둔통은 예리한 통증을 억제합니다. 그래서 눈가가 찢어지는 열창과 같은 날카로운 통증은 경기 중인 복서는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문제는 치열하게 펀치를 교환하면서 생긴 이러한 둔통은 뇌출혈에 따른 심한 두통도 못 느끼게 만든다는 겁니다. 고 김득구 선수나 배기석 선수도 두개골 부위에 골절이 있었으나, 경기중인 당사자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래전 저도 격렬한 스파링을 하고 난 후 그날은 몰랐는데 다음날 일어나니 머리부터 등까지 피부에 손을 대기만 해도 엄청난 통증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경기중인 선수가 심한 뇌 부상은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징후’는 나타납니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의식을 잃어갑니다. 또 이럴 때 선수는 스스로 정신을 차려보고자 하는 특유의 제스처를 보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김정희 선수의 경우, 2라운드 때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쳐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사인을 내보냅니다. 어떤 선수는 머리를 흔들어 본다든지, 아니면 눈을 깊게 깜박거린다든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 분명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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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정희 군의 영정 모습. [사진=KBS TV '제보자들' 화면 캡처]


이런 사인이 나오면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바로 선수에게 말을 걸어봐야 합니다. 분명한 문장을 말하는지 그것만 확인해도 선수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이 체크를 할 사람은 선수를 가장 잘 아는 세컨과 심판입니다.

김정희 선수의 3라운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세컨이 도대체 왜 수건을 안 던졌는지, 심판 왜 다리가 꼬인 선수의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세컨이나 심판이 이 중요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링닥터가 해야 합니다. 당시 링닥터로 공중보건의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링닥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의학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앞서 언급한 복싱 및 선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결과적으로 세컨, 심판, 링닥터 모두 ‘체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셈입니다.

CT사진을 보니 고 김정희 선수는 이미 2라운드 때 뇌출혈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3라운드는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꼴’이었습니다. 출혈 부분이 너무 심하고 뇌가 심하게 밀려버렸습니다. 이 정도면 쓰러진 후 병원으로 아무리 일찍 갔어도 살려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안타까운 사건의 사망원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세컨이 수건을 너무 늦게 던졌다 - 이건 정말 두고두고 마음의 상처가 됩니다. 일선 지도자들이 선수의 이상징후에 대해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심판이 적절하게 경기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 향후 심판교육을 더욱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3. 경기장이 대학병원과 너무 먼 곳에서 위치했다 - 복싱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 예산을 받아 군 단위 지방에서 경기가 많이 열립니다. 뇌출혈 부상은 1시간 내에 수술이 가능해야 합니다. 따라서 경기장이 신경외과 전문의가 항시 대기하고 있는 대학병원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사고에서도 링닥터는 뇌출혈을 바로 진단했을 겁니다. 하지만 CT장비가 없고, 신경외과 수술도 할 수 없는 지방의료원으로 선수를 이송했습니다. 참고로 제가 관여하는 KBI 대회에서도 뇌출혈 부상이 있었습니다. 사망까지 가지 않은 이유는 빠른 진단과 바로 옆에 있는 국립의료원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복싱대회 주최측이 지금처럼 대학병원과 멀리 있는 시골에서 계속 대회를 연다면 선수 안전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고가 매번 일어나지는 않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은 철저히 버려야합니다. 그게 고인을 위해 저희 복싱인들이 해야 할입니다.

고 김정희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예방할 수 있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 글쓰이 도승진은 현직 치과의사입니다.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누가치과의 원장이죠. 순천향대학병원 치주과의 외래교수를 역임했습니다. 동시에 하루 한 번 복싱을 수련하는 복싱인입니다. 한국권투인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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