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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90년대 초반 ‘바르샤 드림팀’을 이끌었던 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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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1990년대 초반 '드림팀' 바르셀로나의 91-92 챔피언스리그 우승 당시 모습.[사진=UEFA 홈페이지]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레알마드리드는 스페인을 넘어 유럽에서 가장 많은 ‘빅이어(챔피언스리그 우승컵)’를 들어 올린 팀이다. 1956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15-16시즌 AT마드리드를 꺾고 차지한 빅이어까지 총 11개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에 반해 영원한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1992년이 돼서야 팀 역사상 첫 빅이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이후 바르셀로나는 리오넬 메시 등의 활약으로 2000년대에 4개의 빅이어를 더 추가하면서 챔피언스리그 통산 5회 우승을 달성했다.

유럽 대항전에서는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던 바르셀로나가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던 당시,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끄는 바르셀로나는 그야말로 ‘드림팀’이었다. 크루이프는 감독으로서 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열어준 주역이자 선수로도 바르셀로나의 리그 우승에 공헌한 레전드다. 레전드 오브 풋볼이 크루이프의 ‘드림팀’으로 활약하며 라리가 4연속 우승,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크루이프 호의 주역 4인방’을 소개한다.

로날드 쿠만 - 대포 슈팅을 쏘던 스트라이커

네덜란드 출신의 로날드 쿠만은 ‘대포’라는 별명답게 강력한 슈팅이 장점인 선수였다. 포지션은 중앙수비수였지만 공격수와 견줄 만큼 많은 득점을 터트리면서 골 넣는 수비수로 이름을 떨쳤다.

1980년 네덜란드의 흐로닝언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했고, 아약스, PSV아인트호벤을 거쳤다. 흐로닝언에서 89경기 33골, 아약스에서 94경기 23골, PSV에서 98경기 51골을 기록하며 공격수 못지않은 득점력으로 가는 팀마다 맹활약을 펼쳤다. 아약스에서는 리그와 컵대회 등에서 우승을 경험했고, 바르셀로나 이적 직전인 87-88시즌에는 PSV 소속으로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 쿠만은 챔피언스리그 결승 승부차기에서 1번 키커로 나서 시원하게 성공시키며 우승에 기여했다.

89-90시즌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쿠만은 94-95시즌까지 192경기에 출전해 67골을 터트렸다. 바르셀로나에서 쿠만은 아약스 시절 은사였던 크루이프와 재회했고, 그 유명한 ‘드림팀’의 일원으로서 활약을 시작한다. 쿠만은 안도니 수비사레타, 미카엘 라우드럽, 펩 과르디올라, 호세 마리 바케로 등 쟁쟁한 선수들과 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열었다.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90-91시즌부터 93-94시즌까지 라리가 4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91-92챔피언스리그 우승, 1992년 UEFA 슈퍼컵 우승까지 경험했다. 특히 쿠만은 삼프도리아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에 천금 같은 프리킥 득점을 선사했고, 이 골은 결승골이 되며 바르셀로나가 1-0으로 우승하는 데에 밑바탕이 됐다. 쿠만은 이후 93-94챔피언스리그에서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선수로도 좋은 모습을 이어갔다. 1983년 아약스에서 이름을 알리던 쿠만은 20세의 나이로 대표 팀에 발탁됐고, 총 78번의 A매치에 나서 14골을 넣었다. 유로 1988에서는 오렌지 삼총사(루드 굴리트, 반 바스텐,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네덜란드의 우승을 견인했다. 그의 형인 에르윈 쿠만도 유로 1988 당시 네덜란드 대표였다. 현재 에르윈 쿠만은 에버튼 수석코치로 같은 팀의 감독인 친동생 로날드 쿠만을 돕고 있다.

95-96시즌 페예노르트로 이적한 뒤 두 시즌을 소화한 쿠만은 은퇴 후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00-01시즌 비테세 아른헴의 감독을 맡았고, 2001년 12월부터 04-05시즌까지 친정팀 아약스 감독을 지내며 리그와 컵대회 우승을 달성했고, 02-03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8강에 올려놓았다. 05-06시즌 벤피카로 옮겨간 쿠만은 또 한 번 팀을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시켰다. 다음 행선지는 또 다른 친정팀 PSV였고, 여기에서도 리그 우승을 이끌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다.

하지만 2007년 발렌시아 감독직을 맡게 되면서 그의 감독인생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리빌딩을 이유로 주장이었던 다비드 알벨다와 골키퍼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등을 방출 명단에 올리며 구단과 선수단 사이의 갈등을 빚었다. 선수기용에서도 포지션에 맞지 않는 선수를 세우는 등의 기행을 일삼으면서 경질되고 말았다. 어려운 시기에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들어올렸지만 리그에서는 강등권에 근접한 성적을 내면서 팬들의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다. 현재 쿠만은 발렌시아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꼽힌다. 발렌시아 시절을 제외하면 50% 후반 대의 높은 승률을 기록 중인 쿠만은 AZ알크마르, 페예노르트, 사우스햄튼을 거쳐 현재 에버튼의 지휘봉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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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최고의 시절을 보냈다.[사진=AP 뉴시스]


펩 과르디올라 - 펩 그리고 티키타카의 시작

펩 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 감독과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의 선수이자 감독으로 팀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뛰어난 예측력과 위치선정 능력, 높은 전술 이해도,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 등을 갖춘 선수였다. 현재 바르셀로나의 세르히오 부스케츠와 비슷한 유형이다.

과르디올라는 13세였던 1984년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6년 뒤 1군에서 데뷔했지만 아직 10대였던 그는 91-92시즌까지 2군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20살이 되던 92-93시즌부터 크루이프 감독의 드림팀에 들었다. 과르디올라는 92-93, 93-94시즌 2연속 라리가 우승을 경험했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스페인 대표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바르셀로나는 91-92시즌에 이어 93-94시즌에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랐지만 AC밀란에 0-4로 대패하며 고배를 마셨다. 과르디올라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출전했지만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후 바르셀로나는 리그에서 암흑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과르디올라는 주전 자리를 지켰고 바르셀로나는 96-97시즌 수페르코파, 코파 델 레이, 위너스컵에서 우승하면서 트레블을 달성해 다시 한 번 상승세에 올랐다.

과르디올라는 97-98시즌 루이 반 할 감독의 부임 후 주장 완장을 찼다. 하지만 부상으로 시즌을 흘려보냈고, 파르마와 AS로마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잔류를 선택했다. 과르디올라는 00-01시즌을 끝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맨유, 리버풀 등 빅클럽들의 이적 제의가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세리에A의 브레시아로 팀을 옮겼다. 그러나 첫 시즌 약물 복용 의혹으로 4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아 11경기 출전에 그쳤다. 다음 시즌 AS로마로 이적했지만 4경기에 출전했고, 다시 브레시아로 이적해 13경기 1골을 기록했다. 이후 카타르의 알 아흘리, 멕시코의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를 거쳐 은퇴했다.

과르디올라 역시 은퇴 후 감독으로 커리어를 쌓았다. 07-08시즌 바르셀로나 B팀의 지휘봉을 잡았고 시즌이 끝난 뒤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메시를 발굴했고, 기존의 선수들을 내보내며 팀을 개편한 과르디올라는 08-09시즌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11-12시즌까지 네 시즌 동안 14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린 과르디올라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이후 13-14시즌 바이에른뮌헨 감독으로 복귀해 세 시즌 동안 52경기 무패행진, 리그 3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4강, DFB 포칼 우승 등을 이룬 뒤 16-17시즌 맨시티와 3년 계약을 맺으며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다.

미카엘 라우드럽 - 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의 레전드

1990년대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로 손꼽히는 미카엘 라우드럽은 팬텀 드리블로 불리는 인사이드 투 터치 드리블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덴마크 출신인 라우드럽은 아버지인 핀 라우드럽의 영향을 받아 동생 브라이언 라우드럽과 함께 축구를 시작했다. 동생 역시 훗날 덴마크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다. 라우드럽은 자국 클럽의 유소년 팀에서 활약하다 재능을 인정받아 17세에 코펜하겐에서 데뷔했다. 1982년에는 브뢴비로 이적해 데뷔전에서 멀티골을 터트렸고, 첫 시즌에 24경기 15골의 맹활약을 펼쳤다. 다음 시즌에도 좋은 모습을 보인 라우드럽은 83-84 시즌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당시 유벤투스에는 미셸 플라티니,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 파올로 로시 등 최고의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 상황에서 기회를 얻기 힘들었던 라우드럽은 SS라치오로 임대 이적했고, 두 시즌 동안 60경기에 출전해 9골을 터트렸다. 이후 85-86시즌 다시 유벤투스로 복귀해 네 시즌 동안 103경기에 나서 16골을 기록했다. 이 때 라우드럽은 세리에A,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덴마크 국가대표 팀도 유로 1984 준결승에 오르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라우드럽은 89-90시즌부터 바르셀로나의 일원이 됐다. 첫 시즌은 무관에 그쳤지만 90-91시즌 라리가 우승을 시작으로 4연패를 달성한다. 또 91-92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다섯 시즌 동안 마지막인 93-94시즌을 제외한 나머지 시즌에서 모두 40경기 이상을 소화했고 평균 10골 이상을 작성했다. 크루이프 감독의 축구 철학인 ‘토털사커’는 라우드럽에게 꼭 들어맞았다. 라우드럽은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곳곳에 킬패스를 뿌렸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93-94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이후 암흑기를 겪었다. 라우드럽은 호마리우가 영입되면서 주전 자리를 빼앗겼다. 브라질 출신인 호마리우에 밀린 동시에, 라리가의 외국인 선수 출전 제한 조항에 걸려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결국 크루이프와 의견충돌로 감정이 상한 라우드럽은 복수심에 불타 라이벌인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해버렸다.

바르셀로나 팬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라우드럽은 과거의 숙적 레알마드리드에서 두 시즌 동안 맹활약했다. 첫 시즌 만에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다섯 시즌 연속 라리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총 76경기에 출장해 15골을 기록했다. 이후 그는 돌연 J리그행을 선언한다. 행선지는 현재 한국 국가대표 골키퍼 김승규가 뛰고 있는 빗셀 고베였다. 그는 두 시즌을 일본에서 보낸 뒤 다시 아약스로 돌아와 97-98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독일 대표팀과 바이에른뮌헨의 레전드인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라우드럽을 펠레, 크루이프, 마라도나와 함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로 칭하며 “90년대 최고 선수는 라우드럽”이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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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와 유럽 축구 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사진=UEFA 홈페이지]


요한 크루이프 - 토털사커와 크루이프 턴

요한 크루이프는 70년대 최고의 선수이자 90년대 최고의 감독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1964년 아약스에서 데뷔했다. 데뷔 두 번째 시즌 만에 주전을 꿰찼고 65-66시즌에는 18세의 나이로 23경기 25골을 작성하면서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66-67시즌에는 30경기에서 33골을 기록해 에레디비지에 득점왕이 됐으며 아약스는 유럽 최정상 팀으로 올라섰다. 팀이 71년부터 73년까지는 3년 연속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크루이프는 네덜란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유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게 된다. 당시 주전 선수 11명은 등번호 1번부터 11번을 달고 뛰었는데, 크루이프는 이례적으로 14번을 달고 활동하면서 14번을 자신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후 아약스에서는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다.

아약스에서 10번의 시즌을 보낸 크루이프는 73-74시즌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입단 첫 시즌부터 라리가 우승을 경험한 뒤 같은 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다섯 시즌 동안 143경기에서 48골을 터트리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1978년 은퇴를 선언했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그는 금전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고, 이듬 해 30대 초반의 나이로 LA아즈텍스에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후 크루이프는 워싱턴 디플로마, 레반테, 아약스를 거쳐 1984년 페예노르트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낸 뒤 은퇴했다.

크루이프는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도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했다. 50경기에서 33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쳤고, 1974 서독월드컵 스웨덴 전에서 그 유명한 ‘크루이프 턴’을 선보이며 큰 주목을 받았다. 결승까지 올랐지만 베켄바워가 속한 서독을 만나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됐고, 골든볼도 수상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크루이프가 가족 납치 사건으로 대회에 불참하며 또다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크루이프는 선수생활 동안 23개의 트로피를 수집했다. 발롱도르도 3회나 수상했다. 최고의 선수로 은퇴한 크루이프는 1985년 아약스의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토털사커’ 전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흔히 전원 공격 전원 수비로 설명되는 토털사커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사용했던 전술과도 유사하다. 토털사커는 새로운 전술이 아니었다. 크루이프가 선수였을 당시 리누스 미헬스 네덜란드 감독이 사용했고, 크루이프는 토털사커를 가장 잘 이해하고 몸소 보여준 선수였다.

80년대만 해도 감독과 선수들은 ‘각자 맡은 포지션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현대축구에서는 전방압박과 오버래핑, 즉 공격 상황에서 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 상황에서 공격수가 수비에 가담하는 스타일이 일반적이지만, 크루이프 시대의 토털사커는 당시의 축구에 반향을 일으키는 충격적인 전술이었다. 크루이프는 이러한 전술을 바탕으로 아약스에서 KNVB컵 2연패를 달성했고 UEFA 위너스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크루이프는 88-89시즌부터 8년 동안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았다. 이 시기에 현재 바르셀로나 전술의 기반을 다졌다. 당시 주축 선수들을 과감히 제외한 뒤 펩 과르디올라, 호마리우, 로날드 쿠만 등을 영입해 새로운 팀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모든 선수들이 빌드업에 관여하는 축구가 시작됐다. 또 유소년 팀을 대대적으로 개편해 현재의 유스 시스템인 ‘라 마시아(La Masia, 카탈루냐어로 농장을 의미하는 말)’를 설립했다. 크루이프는 유소년 선수들에게도 1군 선수들과 똑같은 축구철학을 주입해 바르셀로나가 오랜 시간 좋은 선수들을 기르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크루이프는 91-92시즌부터 리그 4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초로 빅이어를 들어올린 감독이 됐다.

크루이프는 많은 활동량에 바탕을 둔 토털사커의 신봉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애연가였다. 선수시절에도 매일 많은 양의 담배를 피웠고, 91년과 97년 두 차례 심장수술을 받았다. 금연홍보대사로도 활동했지만 결국 폐암 투병 중이던 2016년 3월 24일 향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90년대 초반 크루이프의 ‘드림팀’을 이끌었던 바르셀로나 4인방에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40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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