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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CM 가수가 장애인 체육 수장으로” - 제4대 대한장애인체육회장 이명호

2,500회의 공연과 20개 CCM 음반을 발매한 남성 4중창단의 가수가 대한민국 장애인체육의 수장이 됐다. 여기에 선수 출신 첫 회장이기도 하다(1, 2대는 국회의원, 3대는 공군참모총장 출신). 오는 23일 제4대 대한장애인체육회장으로 취임하는 이명호(60) 회장은 1만 5,000여 명의 엘리트 선수와 40만여 명의 생활체육 장애인을 지원하는 체육회를 4년간 이끈다.

이명호 회장은 서울 인사동에서 태어났다. 걸음마를 뗄 무렵 갑자기 열병을 앓다가 전신마비가 왔고, 소아마비로 병원을 전전했다. 의료수준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던 까닭에 병원치료를 받았지만 장애가 굳어졌다. 다행히 성인이 되면서 몸의 기능이 조금씩 회복됐고, 재활과 운동을 통해서 상체를 사용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게 됐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혼자 글을 익힌 이명호 회장은 독서를 하며 세상을 깨우치고 분신과도 같은 목발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 10대 후반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한 이 회장은 몇 년 후(가족은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함) 홀로 부산에 남아 30여 년을 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 날씨가 마음에 들었어요.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눈이 안 오니 넘어질 우려가 적었죠. 그 당시 서울, 경기 지역은 눈이 많이 와서 겨울만 되면 제가 밖을 나갈 수 없었어요.” 맞다. 비장애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장애인들에게는 큰 문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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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호 제4대 대한장애인체육회장는 인터뷰를 하면서 웃음을 자주 지었다. [이천=채승훈 기자]


노래하는 체육회장

하지만 독립을 한 진짜 이유는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산의 한 재활원으로 들어가 목공예를 시작으로 시계수리 등 열악한 환경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에 탈출구는 노래였다. 모태신앙을 통해 가스펠 ‘호산나 선교중창단’팀에서 베이스 파트를 담당하며 자선음악회와 방송 공연 등에 나섰다. 앞서 소개한 많은 공연과 음반은 그의 노래실력을 시사한다.

“내 모든 것을 기록하면 결국 내 자랑일 뿐이다”라는 개인철학이 있는 이 회장은 가수시절 테이프를 가진 게 없다. 지금은 음악(가수)한 사실을 주변인도 잘 모른다. 이명호 회장은 옛 친구들을 만나면 그 때의 화려한 나날을 함께 추억하고 노래도 부른다. “주로 7080 시절 노래를 좋아해요. 다양한 노래보다 제 음폭에 맞는 노래를 즐겨 부르죠.” 가끔 “노래 잘 하네요”라며 주변에서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사실 가수인데 말이다.

선수-지도자-행정가

평상시 힘이 좋다고 자부하던 이명호 회장은 ‘힘자랑’을 위해 역도를 시작했다. 장애인역도를 통해 새로운 인생의 서막을 열었다. 전문적인 체육 지식이 없었기에 그는 쇠파이프 양 끝에 시멘트로 만든 역기를 들며 무작정 훈련했다. “지금처럼 여건이 좋았다면 아마 더 좋은 선수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분야에서 특출 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힘자랑을 할 수 있었지만 국제적으로 한계를 대회를 통해 느꼈죠.” 선수생활을 접은 이 회장은 장애인스포츠에 대해 이해하며 지도법 등을 연구했다. 후배 장애인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부산에서 전국 최초로 지역장애인체육회를 만들었어요. ‘부산광역시장애인체육회’라는 이름을 그때 지었죠. 보건복지부가 장애인체육을 담당하던 시절이었는데 문화체육관광부로 부처 이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냈죠. 장애인선수들의 간절함이 한 목소리가 되어 지금의 체육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장애인체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명호 회장은 장애인 체육 행정가로 변신했다. 그리고 부산을 토대로 현실의 높은 장벽에 맞서 장애인체육의 밑바탕을 만들어갔다. 돈을 구걸하러 다닌다는 오해를 숱하게 받았지만, 장애인도 세금을 내는 만큼 장애인을 위한 체육진흥이 있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2005년 대한장애인체육회가 출범한 직후 이 회장은 경력직으로 입사해 생활체육부, 전문체육부, 시설운영부와 이천훈련원 원장을 역임했다. 장애인체육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수-지도자-행정가’를 거친 만큼 탁상행정이 아닌 현장 중심의 행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효율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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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호 장애인체육회장은 시종 유쾌하면서도 장애인체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소신을 보였다. [이천=채승훈 기자]


유쾌한 휠체어 회장

“직원들도 누구나 현장에서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행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죠. 각자가 능동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일을 찾아 하는 것이 중요하죠. 장애인선수들의 표현이 부족하더라도 현장에서 필요한 점과 선수들이 바라는 점을 빨리 알아야 합니다.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며 함께 가는 장애인체육을 만들겠습니다.” 더없이 사람만 좋아 보이는 이명호 회장은 이런 말을 할 때는 아주 다부졌다.

낭만이 살아 있는 이명호 회장은 지금도 소외계층을 위해 봉사를 한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작든 크든 나누는 일은 다시 채워져요. 우리네 삶이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어르신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한계가 있죠. 그래서 수용시설이 아닌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확충하고 싶어요. 이게 꿈입니다. 내 생전에 할 수 있으려나”라며 웃음을 보였다.

평상시 이 회장은 표준어를 쓰지만 흥분하거나 고향(제2의 고향 부산) 친구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부산 사투리를 하는 ‘부산 사나이’였다. 대한장애인체육회가 창립되고 서울로 올라와 지금은 이천에서 터를 잡았다. 회장직을 수행하더라도 이사를 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훈련원의 선수들을 더 만나고 소통하면서 장애인체육의 현장에서 바라보며 더 필요한 정책을 위해 발로 뛰겠습니다. 또 무엇보다 다양한 장애인체육에 종사하는 이들과 대화하고 스폰서도 최대한 많이 받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휠체어로 전국을 누벼야겠죠?” 이명호 회장은 유쾌하면서도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이명호 회장은 장애인 선수들이 사회 일원으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계획 중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봐줘라’는 식은 지양해야 해요. 지금까지 장애인들이 불합리한 여건에서 살아왔지만 자신들의 역량을 키우고 그에 맞는 목소리를 내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선수들의 일자리 창출을 할 수 있도록 후배 장애인체육 선수들을 트레이닝 할 기회를 마련해야죠. 모든 선수가 실업팀에 들어갈 수 없지만 준 실업팀을 만들어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장애인체육회 수장으로 임기 동안 일하는 회장의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언젠가 노래방에서 이명호 회장의 노래를 꼭 듣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 인터뷰였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이천)=곽수정 객원기자 nicecandi@naver.com]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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