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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오픈의 잊혀진 역사] 4라운드 대회가 3일만 열리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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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서울 컨트리클럽에서 한장상이 우승하던 한국오픈.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천안)= 남화영 기자] 오늘날 남자 골프대회는 4일간 4라운드로 열리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 국내 골프대회가 단 두 개만 열리던 시절에는 3일 대회를 중심으로 열렸다.

예컨대 한국오픈은 제3회인 1960년 10월22~24일 서울CC에서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일 경기로 치러졌다. 1962년은 4일 경기로 치렀지만 그건 악천후 날씨로 인한 오늘날의 '예비일' 제도를 활용했던 것 같다. 다시 3일로 복귀한 뒤에 1968년 6월7일 금요일부터 일요일인 9일까지 3일 경기로 치렀다. 한국오픈에서는 60년대 8년간을 4라운드를 3일 경기로 치렀다. 제12회 대회가 열린 1969년6월5(목)~8일(일)에서야 4일 경기로 복귀했다.

60년대에 한국오픈과 함께 열리던 골프대회인 한국프로골프(KPGA)선수권은 제2회인 1959년 6월19(금)~21일(일) 3일 경기로 열린 것을 시작으로 12회인 1969년 9월3~5일까지 줄곧 3일 경기로 열렸다. 제13회인 1970년부터 9월2~5일의 4일 경기로 바뀌고는 4라운드 시스템이 정착됐다. KPGA선수권은 11년간 3일 경기 시스템을 유지했다.

왜 3일만 열렸을까? 이에 대해 문기수 KPGA창립위원은 흥미로운 답을 주었다. “당시 2라운드 18홀 경기를 마치면 본선에 오른 선수가 20~40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전에 18홀과 오후에 18홀 라운드를 치렀다. 시간과 일정상 이유도 있겠지만, 당시의 논리로는 명색이 최고의 선수를 가리는 대회의 본선인만큼 골프 기량 뿐만 아니라 체력 테스트가 겸비되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12명으로 시작된 KPGA창립위원은 현재 6명이 생존해 있다.

당시 골프대회를 치르던 군자리(현재 서울대공원 자리)의 서울컨트리클럽에는 카트도 없이 산 등성 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하루에 36홀로 승부를 보는 것이 일반적인 마지막날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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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픈이 열리던 군자리의 서울컨트리 코스. 당시 골퍼들은 카트길 없이 걸어서 18홀을 라운드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날 마라톤처럼 36홀을 치르면서 3라운드 경기를 치르던 방식은 어떻게 다시 4라운드 시스템으로 바뀌었을까? 그건 미국에서 나온 4라운드 4일 경기 트렌드로의 변화가 전파된 때문이다.

US오픈은 전 세계에서 코스를 가장 어렵게 세팅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US오픈도 60년대 중반까지는 대회 첫째 날과 둘째 날 18홀씩 돌고 마지막인 토요일(혹은 일요일)에 2라운드, 즉 36홀을 한 번에 도는 방식으로 사흘간 열렸다. 그런데 1964년(72회)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다 콩그레셔널컨트리클럽에서 열린 US오픈의 우승자 켄 벤추리가 마지막 날 열사병으로 쓰러진 사건을 계기로 다음 해부터 하루를 늘려 나흘간 4라운드(72홀)를 도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 벤추리의 우승은 대회의 형식 자체를 바꿀 만한 사건이었다. 마지막 날인 토요일 오전 18홀을 끝내고 오후에 다시 18번 홀을 걷는 건 선수에겐 고행(苦行) 그 자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지쳐갔다. 얼굴과 목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셔츠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3m 퍼트를 남겨두고 그는 몸을 쥐어짜듯 긴장하다가 간신히 마지막 스트로크를 했고 공은 결국 홀컵으로 들어갔다. “맙소사, 내가 오픈을 우승했어.” 벤추리는 절규하듯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외쳤다.

벤추리의 US오픈 우승은 1960년대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였다. 그는 56년 아마추어 자격으로 마스터스를 우승할 뻔했다. 유망주로 부상했지만 마스터스 마지막 날 컨디션 조절에 실패해 재키 버크 주니어에게 1타 차로 석패했다. 벤추리는 이듬해 프로로 전향해 4년 동안 10승을 거뒀다. 하지만 61년 자동차 사고 이후로 슬럼프를 겪었고, 62년 신경 압박증까지 앓으면서 몸 오른쪽에 마비가 왔다. 2년 뒤인 64년 몸은 나았지만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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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US오픈의 켄 벤추리.


64년 US오픈은 벤추리가 지역 예선을 통과해 힘겹게 출전 자격을 얻은 대회였다. 6월18일부터 시작된 그해 US오픈의 최대 핸디캡은 무더위였다.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치른 대회 첫날, 벤추리는 2오버파 72타를 쳐 선두 아놀드 파머에게 4타 뒤졌다. 둘째 날엔 70타를 쳤지만 선두인 토미 제이콥스보다 7타나 뒤져 있었다.

20일 토요일은 18홀을 두 번 도는 일정이었다. 이날은 특히 더웠다. 수은주가 37.7도를 가리켰다. 오전 라운드 첫 홀에서 벤추리의 3.2m 버디 퍼트가 홀컵에 붙었다. 그가 마무리하러 걸어가자 공이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홀인하면서 행운의 버디가 나왔다. 조짐이 좋았다.

벤추리는 전반에서만 5언더파를 쳤다. 후반에도 푹푹 찌는 더위가 이어졌다. 17번 홀에 이르자 6언더파이던 벤추리는 너무 더운 나머지 골프백에 주저앉았다. 마지막 두 홀에서 연속 보기를 하며 66타로 3라운드를 마쳤다. 스코어를 접수하고 클럽하우스로 간신히 들어간 그는 라커룸에서 의사의 응급처방을 받아야만 했다. 열사병 진단이 내려졌지만 벤추리는 “죽더라도 코스에서 죽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의사는 소금과 차를 줬고, 잠시 후 마지막 4라운드가 시작되자 젖은 수건을 벤추리에게 주면서 라운드를 따라나섰다.

선두권 선수가 쓰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되자 조이 디 미국골프협회(USGA) 사무총장도 벤추리를 따라 걸으면서 불상사가 생길까 조마조마했다. 의외로 벤추리는 경기를 잘 풀어나갔다. 18번 홀에서는 2위 제이콥스에게 4타 앞서 있었고, 벤추리는 결국 3m 파 퍼트를 넣으면서 최종 스코어 70타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USGA는 이듬해인 1965년부터는 마지막 라운드를 하루 더 늘려 나흘간 72홀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벤추리는 이 우승 이후로, 2승을 추가하며 마음의 부담을 떨쳤고 마침내 ‘올해의 선수상’을 탔다. 벤추리는 1967년 통산 14승 경력으로 은퇴한 뒤 방송 진행자로 활동했다. 2013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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