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노먼의 독특한 스윙 피니쉬 모습.
모 노먼의 전설
* 노먼의 연습라운드를 따라갔는데 그는 공을 4개씩 쳤다. 그가 친 4개의 공은 언제나 3미터 이내에 모여 있었다. 그는 모든 샷을 5초 이내에 해치웠다.
* 노먼은 당시의 PGA 최 장타자 샘 스니드와 시범경기를 하게 되었다. 파4 홀의 240야드 지점을 가로질러서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샘 스니드는 넘기는 것을 포기하고 아이언 티샷을 했다. 스니드가 드라이버를 들고 나오는 모 노먼에게 절대로 개울을 넘길 수 없다고 충고하자, 모 노먼은 말없이 가운데의 다리를 가리켰다. 그가 친 티 샷은 다리 위를 굴러서 개울을 넘어갔다.
* 대회를 앞두고 노먼의 연습라운드에 기자들이 따라갔다. 233야드의 긴 파 3홀에서 티샷을 하려는데 기자가 농담을 건넸다. “지난주처럼 4퍼트는 안 하겠지요?” 모 노먼이 말 없이 티샷을 한 후 공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대답했다. “오늘은 퍼팅을 안 해도 됩니다.” 그의 공은 그대로 홀인원이 되었다.
* 노먼이 7년 만에 처음으로 OB를 기록했다. 다음날 신문의 헤드라인은 “모 노먼도 인간이었다”였다. 그 OB는 노먼의 평생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 노먼은 기다리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시합 중 어느 파 4홀에서 앞 팀이 페어웨이에 대기 중이었다. 캐디가 3번 우드로 티샷하고 9번 아이언이면 온그린 되겠다고 말하자 모 노먼은 즉시 9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했다. 그리고 다음, 그가 친 3번 우드 세컨드 샷은 쉽게 온그린 되었다.
* 티 위에 공을 올려놓고 드라이버 연습을 하는데 131개의 공을 칠 때까지 그 티가 제자리에 꼽혀 있었다.
노먼이 자동차 트렁크에 앉아서 전 재산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캐나다박물관]
1929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키치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모 노먼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살았다. 같은 말을 아주 빠르게 반복해서 말하고, 낯선 사람과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대화를 피했다. 숫자를 셈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천재적이어서 훗날 자기가 플레이 했던 캐나다 375개 골프장 모든 홀들의 거리를 기억했다.
열 살부터 캐디를 시작한 모는 왼손잡이였는데 열두 살 때 오른손잡이 골프채를 얻어서 공을 치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까지 100타를 깨지 못했고 열일곱 살이 넘어서야 70대의 점수를 칠 수 있었다. 골프는 말이 필요 없고 혼자서도 행복했기에 쉽게 빠져들게 되었던 모는 집을 나와 혼자 살았다. 여름이면 골프장 벙커에서 잠을 잤는데 뱀이 다리 사이로 지나가 놀라서 깬 적도 있었다.
19세에 그 유명한 싱글 플레인 스윙을 완성하였는데, 스윙이론을 전혀 배우지 못했던 모는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스윙 테크닉을 모두 무시하고 본능에 따라서 자기만의 스윙을 창조해냈다. 예를 들면 그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잡으라는 이론과 달리 손바닥으로 강하게 잡았다.
노먼은 20세부터는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하여 단숨에 아마추어 최강자로 떠올랐다. 당시 부자들의 행사였던 골프 대회에 나타난 노먼의 모습은 깨끗하게 차려 입은 다른 선수들과 너무나 달랐다. 히치하이크로 겨우 코스에 도착했는데, 단벌의 남루한 옷차림에 골프화 대신 낡은 운동화를 신었고, 구멍 난 골프백에 7개밖에 안 되는 골프클럽을 가지고 나타난 무명선수를 환영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대회 결과는 언제나 노먼의 우승이었고, 노먼은 일등 상품을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며 살았다. 우승 선수는 우승컵과 상품을 받으면서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던 모는 언제나 숨어있다가 상품만 챙겨갔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은 텔레비전이었는데 1년에 10대가 넘는 텔레비전을 골프장 주차장에서 싼값에 팔아 넘겼다.
노년기 모 노먼의 모습. [사진=노먼의 책 'The Feeling of Greatness: The Moe Norman Story' 중에서]
마스터스에 초대된 1955, 1956년 캐나다 아마추어 챔피언
노먼은 1955년 캐나다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드디어 아마추어 랭킹 1위가 되었다. 캐나다의 긴 겨울 동안 한 시간에 10센트짜리 볼링장 핀 세터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던 모에게 1956년 마스터스 대회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당시에는 캐나다 아마추어 챔피언에게 마스터스 출전 자격을 주었는데, 노먼의 유별난 스타일 때문에 초대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나오기도 했다.
마스터스 대회에 도착한 노먼은 자기의 백을 메고 연습라운드를 시작했다. 캐디를 고용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회 주최측에서 무료로 캐디를 구해 주었지만, 시골뜨기 아마추어 노먼은 그런 큰 대회의 분위기를 이겨낼 수 없었다. 1957년에도 마스터스에 초대받았는데 두 번 모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아마추어 자격을 빼앗기고 프로가 된 모 노먼
캐나다 골프협회는 우승상품을 팔았다는 이유로 노먼의 아마추어 자격을 박탈했다. 그러나 진짜이유는 캐나다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두 번이나 우승하면서 시상식에 불참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투어에 참가할 자격이 없이, 어쩔 수 없이 프로가 된 27세의 노먼은 프로와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는 길이 완전히 봉쇄됐다. 1959년 갖은 노력 끝에 꿈에도 그리던 미국 PGA에 진출한 노먼은 1960년 미국선수들의 모욕적인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캐나다로 돌아왔다.
상금이 아주 적은 캐나다 투어에서 활동하며 최저 평균타수상을 다섯 번이나 받았고 55승 달성했지만 그의 상금수입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부족했다. 1980년부터 6년 연속 캐나다 시니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다. 한 달에 400불짜리 모텔에 살면서 자기의 전 재산을 차 속에 싣고 다녔고 때로는 차 속에서 밤잠도 잤는데 1986년에 그 차를 빼앗길 정도의 파산상태에 몰렸었다. 그러나 지인들이 주최한 모 노먼 돕기 자선대회에서 모금한 돈으로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가난한 무명의 골프선수로 끝날 것 같았던 모 노먼의 인생에 반전의 계기가 찾아온다. 그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는데...(노먼의 이야기는 다음 주까지 이어집니다)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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