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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괴력의 펀치력을 가진 ‘불운의 황태자’ 서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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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국제대회 5관왕에 빛나는 고 서정수.


2015년 5월 21일은 매일같이 통화하던 후배 서정수(운봉공고ㅡ홍익대)가 49세를 일기로 타계한 날입니다. 문성길 못지않게 묵직한 펀치로 KO퍼레이드를 펼쳤던 서정수를 추모할까 합니다. 복서로써 활짝 개화(開花)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간 그의 라이프스토리도 나름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서정수는 1966년 11월 15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태생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는 어린 정수를 데리고 인천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인천 금강 체육관에서 그해 복싱을 시작하면서 아버지를 잃은 설움과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으로 달랬죠. 체육관뿐 아니라 동네 공터에서 틈나는 대로 해머를 들고 타이어를 두들기면서 큰 선수가 되기 위한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6년 동안 경기에는 출전치 않고, 본 운동이 끝나면 줄기차게 해머질에 전념했다는 사실입니다. 우공이산(寓公離山)은 이럴 때 어울리는 듯하네요. 이렇게 단련된 펀치력은 후에 5년 동안 선수생활을 하면서 강호들을 무너뜨리는 결정타로 작용합니다. 세계 청소년대회(85년 루마니아) 금메달리스트인 황경섭(67년생, 서원대), 후에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는 조인주(69년생. 동국대), 강형석(71년생. 군산대), 최희용(65년생, 동아대)이 그의 펀치에 KO됐죠. 또 서정수는 89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포함, 국제대회 3관왕에 오른 조동범(한국체대) 등 국가대표 에이스들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렸습니다.

황경섭과 조인주, 조동범 등 주요 대표선수들은 간혹 판정으로 패하는 일은 있지만, 중간에 스톱 당하는 일은 전무하다시피하죠. 그만큼 서정수의 주먹 강도(强度)는 대단했습니다. 서정수를 지도한 김승미 감독(45년생, 고흥)은 문성길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했죠. 또한 세계선수권 메달리스트인 허영모, 그 허영모가 현역시절 가장 힘든 상대로 꼽았던 남성희(경상공고)와 오광수, 그리고 8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리스트인 김용상(66년생, 경희대)은 서정수의 강타에 마지막 종소리를 듣는 것(판정)을 다행으로 여겼죠. 특히 오광수는 서정수에게 패해 아마복싱을 접을 생각을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허영모는 정말 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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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서정수와 1승1패를 기록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신우영 씨.


다시 과거로 돌아가 드디어 6년의 기다림 끝에 1983년 고등학교(인천 운봉공고) 1학년 때 김명복박사배에 첫 출전한 서정수는 첫 경기에서 치열한 난타전 끝에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몇분 후 본부석에서 판정이 잘못됐다며 결과가 번복되는 해프닝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졸지에 첫 출전은 패전의 쓴 잔을 들이키고 말았지요. 당시 상대는 후에 세계 챔피언이 되는 김용강(65년생, 보인상고)이었습니다.

이어 그 해 학생선수권대회에서 신우영(67년생, 대전체고)에게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한 서정수는 대통령배에서는 최희용(65년생, 부산체고)에게, 월드컵 선발전에서는 황동용(62년생, 군산체)에게, 전국체전서는 윤병호(67년생, 전남체고)에게 잇달아 패하며 지독한 성장통을 겪습니다. 언제가 사석에서 서정수에게 지금까지 싸운 국내선수 중 가장 힘든 상대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1984년 학생선수권과 그해 전국체전에서 맞상대하며 1승1패를 기록한 신우영(대전체고)이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아무튼 서정수는 해를 넘겨 1984년 김용상을 꺾고 템머 대회 선발전에서 우승함과 동시에 고희룡, 박제석, 주윤상 등과 함께 본선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인 소련의 카림잔을 꺾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어진 재팬컵에서도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 이듬해 고교 졸업반인 1985년 사우스포였던 서정수는 제가 운동했던 88체육관으로 여러 차례 스파링을 왔습니다. 그리고 그 파트너는 저였습니다.

3차례 정도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공방전을 벌였는데 지금도 그때 스파링 흔적이 필자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필자의 오른쪽 귀가 서정수의 강타에 양배추처럼 쪼그라든 겁니다. 저도 아마시절 서정수와 같은 왼손잡이 국가대표였던 권채오(60년생, 한국화약)와 오광수(65년생, 한체대)와 맞대결을 벌여 승패를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서정수는 레벨이 달랐습니다. 권채오의 펀치가 소프트한 느낌이라면, 오광수의 펀치는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따끔한 펀치였죠. 그런데 서정수의 펀치는 둔기로 맞는 듯한 해머였습니다. ‘3살이나 어린 후배가 그동안 많이 컸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2년 전 황동룡(62년생, 군산체)과의 월드컵 선발전에게 중간에 경기를 포기했던 서정수가 환골탈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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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템버 국제대회에 참가한 정용범과 서정수(우측).


또 다른 일화가 생각나네요. 1985년 후에 프로복싱 두 체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는 옥천고의 이열우(66년생, 극동체)이 우승권대회 플라이급에서 정상에 오르고, 서정수와 함께 꿈나무 합숙을 했습니다. 스파링을 자주 했는데 그 때마다 이열우는 서정수에 맹공에 일방적으로 난타를 당했습니다. 그가 청주사대에 입학하려는 꿈을 접고, 이듬해 프로행으로 급선회하는 데 서정수가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겁니다.

1985년 서정수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대회 5관왕의 대업을 달성합니다. 그러나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선발전 플라이급에서 김광선을 만나 0-5로 완패를 당하며 숨고르기에 들어가죠. 결국 밴텀급으로 체급을 올린 서정수는 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7년, 올림픽 예비고사인 제1회 서울컵 국제복싱대회 4강전에서 동갑내기인 변정일(66년생, 태안)을 군말없는 판정으로, 결승에선 허영모(해태)를 꺾은 소련의 아르테미에프를 무난하게 제압하고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문성길이 빠진 국내 밴텀급 1인자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해를 넘겨 대망의 본고사인 88 서울 올림픽 최종선발전. 공교롭게도 허영모와 김성길, 변정일, 서정수가 나란히 1.2.3.4.차 선발전에서 우승합니다. 최종 평가전을 앞둔 시점에서 국제대회 금메달이 없는 변정일의 전력이 최약체였죠. 하지만 변정일을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 제압했던 김성길(62년생, 한국체대-상무)이 그만 부상으로 중도 탈락하는 변수가 발생합니다. 김성길은 1987년 제13회 킹스컵에서도 변정일과 동반출격해 변정일을 꺾은 태국선수를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며 우승하는 등 국제대회 3관왕에 빛나는 실력파였습니다.

결국 변정일과 서정수, 허영모가 리그전을 벌여 서로 물고 물리며 공히 1승1패를 기록하자 복싱연맹 이사회는 노쇠한 허영모를 탈락시키고, 변정일과 서정수의 단두대 매치를 결정했습니다(허영모를 탈락시킨 진짜 이유는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앞선 이 칼럼의 허영모 편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국제대회 5관왕인 서정수는 이 경기에서 유효타를 많이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우세하게 끌고갔지만 경기는 변정일의 3-2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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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88 서울 올림픽 2차선발전에서 변정일을 꺽고 우승하는 김성길(좌측).


경기 전 변정일의 스승이자 복싱계의 손자병법으로 통하던 황철순 관장(55년생, 고성)이 “적어도 한화 회장단 소속선수 한 명쯤은 올림픽에 선발되는 것이 명분에 맞지 않느냐?”고 연맹 이사진에 열변을 토한 것이 결정적으로 먹혔던 거죠. 신라시대 골품제도로 말하면 변정일은 복싱계 수장인 김승연 회장의 골드라인 연결축인 한국화약 소속선수로 김성은, 황철순 등이 스태프로 포진된 완벽한 성골인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반면 신생팀 홍익대 소속의 서정수는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견골(犬骨)인 속칭 ‘어둠의 자식’이었죠. 후에 변정일의 스승인 황철순 감독은 필자와 독대한 자리에서 당시 올림픽은 서정수가 나가는것이 순리였다고 양심고백을 했죠.

경기 후 서정수는 홍익대 총장에게 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죠. 그리고 이 총장님은 “정수야! 수고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홍익대 복싱부는 완전해체다. 내일부터 운동 나오지 말아라”라고 내뱉으며 자리를 떴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날 이후 홍익대 복싱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비권투인이었지만 그 총장은 정말 복싱을 사랑했던 분이었다고 서정수는 말했죠. 이후 연맹에서 보상 차원으로 킹스컵에 출전시키자 서정수는 대충 몸만 풀고 경기에 나가서 은메달을 획득하고는 냉정하게 아마추어 세계와 등을 돌립니다.

서정수는 1989년 9월 어느 날 동아체육관의 김현치 회장과 프로 계약서(계약금 3,000만 원)에 서명을 했습니다. 계약 때 5전 이내에 세계 타이틀매치를 치른다는 구두 약속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12월 프로 데뷔전에서 필리핀의 비세라 선수를 판정으로 꺾고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지만 그 경기가 프로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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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프로데뷔전을 치르고 있는 서정수(왼쪽).


개인적으로 인내심이 없는 서정수가 미웠습니다. 결국 그는 복싱을 정리하고, 1990년 일반병으로 입대했죠. 군에서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을 TV로 시청했는데, 밴텀급 결승에서 황경섭에 KO승을 거두고 우승한 필리핀 선수는 과거 서정수에게 KO로 나가 떨어진 선수였습니다. 당시 만감이 교차했다고 하네요. 제대 후 용접기술을 배운 서정수는 홀어머니와 떨어져 인천 모처에 월세방을 얻어 홀로 기거했고, 그 기술로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삼아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생전에 서정수는 동료 이열우처럼 애주가였죠. 결국 술이 원인이 되어 짦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서정수는 제68회 전국체전에서는 저녁마다 폭음을 하면서 결승에서 취권(?) 전법으로 윤승희(경희대)를 꺾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죠. 품질 좋은 원석(原石)이었던 서정수. 좋은 세공사(細工師)를 만나지 못하고,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그 이름. 지금은 그저 편안하게 영면하기만을 바랍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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