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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호택의 크로스카운터] 대한민국 ‘격투 아재’들의 이유 있는 반란

지난 주말 한국 종합격투기(MMA)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의미 있는 경기들이 열렸다. 먼저 토요일(28일)에 한국 종합격투기 1세대 파이터라고 할 수 있는 최영(39, LAND’S END)이 로드FC의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최영은 초창기에 함께 활동했던 파이터 김훈(36, 팀파이터)과의 잠정 타이틀전에서 3라운드 종료 3-0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일요일에는 종합격투기 초창기부터 해설자로 활약해온 김대환(38, 김대환MMA)이 일본에서 열린 종합격투기 대회 워독에 출전, 과거 프라이드FC서 활약했던 45세의 베테랑 마쓰이 다이지로(45, 일본)를 1라운드 실신 KO로 꺾으며 생애 첫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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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나이에 고대 했던 국내 챔피언벨트를 따낸 최영. 많은 타격을 허용한 까닭에 대형화면에 비춰진 얼굴이 안쓰럽기만 하다


나이 마흔에 챔피언벨트를 두른 최영


최영은 2003년, 재일교포 유학생 신분으로 한국을 찾아 종합격투기를 시작했다. 한국 종합격투기의 르네상스를 알린 최초의 리얼리티 격투 프로그램 <고! 슈퍼코리안>에 출연하며 독특한 캐릭터와 뛰어난 실력을 통해 격투기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최영은 유독 국내 경기에서 챔피언 벨트와는 인연이 없었다.고 슈퍼코리안 결승전에서는 임재석을 상대로 생애 첫 실신 KO패를 당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10여 년이 흐른 후, 여전히 파이터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최영은 일본의 딥(DEEP) 챔피언 자격으로 다시 한번 로드FC 챔피언에 도전했다. 하지만 챔피언 차정환을 상대로 연장 라운드에서 체력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KO패를 당했다.

이렇게 챔피언의 인연이 멀어지는 듯 하던 차에 이번에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리고 최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라운드부터 강력한 양훅으로 무장한 김훈에게 그로기까지 몰리며 위기에 빠졌지만 끝내 이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그레플링 싸움으로 상대를 끌고가 승리를 거뒀다.

경기 내내 이동기 해설위원은 끊임없이 타격을 허용하면서도 전진 압박하는 최영의 인파이팅 전략에 우려를 표명했다. 1세대 해설가이자 격투인의 안타까운 심경이 묻어난 것이다. 최영의 눈두덩이는 찢기고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양 눈이 크게 부어올라 제대로 시야를 확보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고국에서의 챔피언 벨트는 간절했다.

1세대 파이터 최영은 챔피언 벨트를 두른 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오늘 경기 점수는 0점이다. 이대로 차정환에게 도전할 수는 없다. 더욱 노력해서 성장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우리나이로 마흔, 선수생활을 마감할 나이에 그는 여전히 ‘정진’과 ‘성장’을 강조한다.

이날 대회에는 최영뿐 아니라 초창기 한국 MMA를 이끈 1세대들이 대거 참가했다. 하지만 서로의 위치는 사뭇 달랐다. 최영이 선수로서 링 위에 올랐다면 다른 1세대 파이터들은 지도자로 함께 했다.

창원의 대표 파이터로 호쾌한 타격이 장기였던 문종혁 관장(43, 창원KPW)은 제자의 메이저 데뷔 두 번째 경기에 세컨으로 참여했다. 창원KPW의 황인수는 로킥에 이은 파운딩으로 러시아의 즈데넥 폴리브카에게 KO승을 거두었다. 경기 스타일은 선수시절 문종혁 관장을 빼다 밖은 듯, 강렬하고 공격적이었다.

제자의 승리 축하 자리도 참석하지 못한 채, 문종혁 관장은 다른 사업 관련 업무로 창원으로 부랴부랴 내려갔다. “물건을 키웠다. 축하 드린다”는 축하 전화에도 그는 “잘 못한다. 아직 멀었다”며 예의 ‘상남자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지난 메이저 대회 데뷔 무대에서 KO승을 거두고 환호하며 달려오는 제자에게 “쓰러진 상대 선수를 먼저 살피라”며 돌려보냈던 그다웠다.

최영과 함께 <고! 슈퍼코리안> 4인방 중 하나로 인기몰이를 했던 쾌남아 이재선 감독(38, 싸비MMA) 역시 제자를 데리고 경기장을 찾았다. 최영과 이재선은 과거 챔피언 결정전을 놓고 격돌해 근소한 차이로 최영이 판정승을 거둔 인연이 있다. 이재선 감독의 제자는 장애를 딛고 챔피언까지 올랐던 이길우였다. 부상과 개인 사정으로 2년여 만에 다시 오른 무대에서 이길우는 일본의 강자를 꺾고 재기에 성공했다. 이재선 감독은 눈물을 흘리며 맘 고생이 심했던 제자를 꼭 안아주었다. 선수시절 근육질 체격을 자랑하던 이재선이지만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이길우의 경기를 준비시키면서 걱정이 많아 마음고생이 심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서 살이 좀 빠진 것 같다”며 쑥스럽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후배이자 제자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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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만화 같은 스토리다. 김대환 해설가(왼쪽)가 일본에서 챔피언이 됐다


챔피언이 된 해설가, 김대환

챔피언 매치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 날인 일요일 저녁 일본에서는 중소 종합격투단체 워독의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전이 열렸다.

기존 챔피언은 프라이드 시절부터 반더레이 실바, 퀸튼 잭슨 등과 자웅을 겨루던 베테랑 마쓰이 다이지로, 도전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격투기 해설가 김대환이었다. 김대환은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종합격투기 선수로 투신했다. 해설가이자 체육관 지도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는 선수에 대한 꿈을 차근차근 이루어 왔다. 생애 첫 번째 타이틀 도전에서 그는 10여 년 전 햇병아리 해설가로서 직접 경기 해설을 한 경험이 있던 마쓰이 다이지로와 마주섰다.

경기는 1라운드 초반 김대환의 강력한 레프트 훅이 그대로 마쓰이 다이지로의 안면에 꽂히며 TKO승으로 끝났다. 승리를 하고도 김대환은 환호나 가벼운 미소조차도 보여주지 않았다. 베테랑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김대환은 “운이 좋았다”며 짧고도 간결하게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마냥 격투기가 좋아 해외 격투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격투마니아 대학생은 국내 격투기를 대표하는 해설자로, 선수를 키우는 지도자로, 이제는 한 단체의 챔피언에까지 오르며 자신만의 꿈을 키워왔다. 그의 격투 인생에 있어서 격투기는 숭고한 가치이자 삶의 도전을 이어가는 확실한 명분이었다.

종합격투기 불모지에서 첫 뿌리를 내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청년들은 이제 나름의 자리에서 하나둘씩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부분이 이제는 ‘아재’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들의 도전 정신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다.

격투아재들의 도전은 계속된다

격투아재들의 반란은 격투계 전반에서 계속되고 있다. 국내를 대표하는 입식격투기 단체 MAX FC(맥스FC)는 오늘 11월 25일(토) 안동에서 개최되는 MAX FC11 대회에 초창기부터 활약한 베테랑 곽윤섭(41, 대구청호관)을 공동 메인 이벤터로 선정했다. 곽윤섭은 100전이 넘는 선수생활을 경험한 한국 격투기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MAX FC대회에서 띠동갑을 넘어서는 어린 상대 장태원(24, 마산팀스타)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KO패 했지만, 명예회복을 외치며 설욕에 나선다.

올해 7월 국내 최초로 아재들만의 아마츄어 격투리그를 발족한 아재배틀(대표 남일)은 제2회 대회를 오는 11월 5일(일) 의정부 원투체육관에서 개최한다. 지난 대회보다도 더 많은 아재 파이터들이 선수를 목표로 링 위에서 열정을 불태울 예정이다.

전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서 젊음을 담보로 국가 경제를 일으킨 60대, 70대 실버세대의 40대 성공신화와는 다르게 요즘 40대의 표면적 삶은 여전히 불안하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안정적 삶을 영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미생’들이 대부분이다.

젊은 세대들은 유행에 뒤떨어지면서도 특유의 고집은 꺾지 않는 기성 세대를 가리켜 ‘아재’라는 단어로 희화해 표현한다. 하지만 현실의 아재들은 여전히 가슴 속 피 끓는 청년의 로망을 지니고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도전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가정을 지키기 위해, 회사와 직장에서 자신의 입지를 성장시키기 위해 쉼 없이 격전을 치른다. 때론 현실의 삶 속에서 비춰지는 모습이 초라하고, 서글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꺼지지 않는 삶의 열정은 있는 그대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대한민국 아재들을 응원한다.

* 이호택은 국내 종합격투기 초창기부터 복싱과 MMA 팀 트레이너이자 매니저로 활동했다. 이후 국내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격투 이벤트의 기획자로 활약했다. 스스로 복싱 킥복싱 등을 수련하기도 했다. 현재는 마케팅홍보회사 NWDC의 대표를 맡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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