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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홍성 KPBF 대회에서 만난 복싱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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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현병훈 KPBF회장, 유제두 관장, 한보영 해설위원.


지난해 12월 충남 홍성에서 개최된 KPBF 복싱경기장을 찾은 필자는 참으로 많은 감회를 느꼈습니다. 홍성은 충절의 고향으로 고려말 최영 장군을비롯해 백야 김좌진, 만해 한용운, 사육신의 한 명인 성삼문 등 역사적 위인들의 탄생지죠. 여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여담이지만 한용운 선생 등 독립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들의 유족들에게는 국가가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였던 장준하 선생 유족이 일원동의 월세방을 전전했고,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며느리와 두 딸은 임대아파트에서 고난한 삶을 사셨죠. 윤봉길 의사의 아내인 배용순 씨도 동작구 상도동의 달동네에서 살았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아들인 한보국은 고향 홍성에서 엿장수 생활을 하다가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6.25 때 인민군을 따라 북한으로 넘어갔는데, 홍성주민들은 좌우익에 연연하지않고 올곧은 삶을 사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당국이 만해 한용운 선생을 높이 평가해 평양시내에 고급 APT를 마련해주고, 1964년엔 환갑잔치를 융슝하게 차려줬다 합니다. 이웃나라 중국만 하더라도 6.25 참전병사들에게 아파트 한 채와 대졸초임에 준하는 연금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하신 분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줘야 합당하죠. 현재 한용운 선생은 국립묘지가 아닌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어 있는데 독립운동가 분들의 평전을 집필한 김상웅 씨는 “흙탕물 같은 현대사라는 연못에 핀 한 떨기 연꽃”이라 평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홍성은 현 KPBF 현병훈(58년생) 회장의 고향입니다. 7년째 많은 출혈을 감수하면서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복싱인이죠. 별다른 스폰서 없이 ‘중계방송 제작지원비’까지 지불하면서 대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현 회장이 운영하는 신성화학과 요양원 등에서 번 돈을 복싱을 위해 재투자하고 있는 겁니다.

중학교 때부터 복싱을 수련했고, 아마추어 시절 유망주 소리를 들은 현 회장은 명문 홍성고에 입학하면서 복싱과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오랜세월이 흐른 뒤 옛 향수를 잊지 못해 복싱계에 컴백을 했습니다. 현재 전국 200여 개의 체육관이 가입한 KPBF는 열악한 여건 속에서 현 회장이 운영하는 일산의 ‘신성복싱체육관’ 내에 KPBF 협회사무실을 차렸고, 1년에 4. 5회 대회를 주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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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유형욱 사범(왼쪽), 유경종 한국챔피언(오른쪽)과 포즈를 취한 유제두 관장.


KPBF 홍성 대회의 경기장에 들어서니 한국복싱에 큰 어르신 중에 한 분인 유제두(46년생, 고흥) 관장과 고기봉(52년생) 고연봉(63년생, 이상 파주) 형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유제두 관장은 한평생을 복싱에 매진한 복싱인이죠. 이번에 KPBF 슈퍼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한 유경종(91년생, 태양체, 4승1패1무)의 매니저이기도 한 유 관장은 많은 복싱인들의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유제두 관장도 형제복서로도 유명한데 유제두 관장은 아마추어시절인 1967. 68년 각종 전국대회에서 은메달 2개와 동메달 2개를 땄습니다. 금메달은 없었죠. 하지만 동생 유제형은 1975년 전국신인선수권, 1977년 아시아선수권 1차선발전, 1978년 세계선수권 2차선발전 등 3차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동국대의 황충재, 한체대의 천갑수, 육군의 강성태 등 강자들을 제압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제두 관장은 현역시절 5연속 KO승이 최고였지만, 유제형은 13연속 KO승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이는 역대 연속 KO승 한국기록에서 5위에 해당합니다. 유제형은 형의 그늘에 가려서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스피드 순발력 펀치력을 갖춘 실력파복서였습니다. 통산전적은 34전 29승(24KO)5패입니다.

유제두 관장은 슬하에 3남매를 두었는데 큰아들인 유형욱(73년생)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고, 둘째 유수민(75년생)은 성균관대를 나와 항공사에서 스튜어디스로 일을 했습니다. 막내 유상욱(77년생)도 성균관대를 졸업하는 등 복싱계에서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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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봉(왼쪽)-고기봉 형제심판.


고기봉-고연봉 형제복서는 둘 다 전국 아마추어복싱선수권 우승자 출신으로 현재 프로복싱 심판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고기봉은 1971년 전국신인선수권 라이트플라이급에서 우승했는데, 예전에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한 것처럼 프로로 전향한 후 김태식과 신갑철을 각각 KO로 잡았던 강타자였습니다. 동신체육관 후배인 박찬희는 고기봉에 대해 펀치력과 기술을 고루 갖춘 범접하기 힘든 선배복서였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동생 고연봉도 1981년 전국신인선수권 라이트플라이급에서 진승호를 2회 KO로 꺾고 우승하며 난형난제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이 대회는 역대 신인대회 사상 우수한 선수가 가장 많이 배출되었는데, 고연봉을 비롯해 오광수(코크급), 진행범(페더급), 전칠성(라이트급), 송경섭(웰터급) 등이 체급별 우승자였습니다. 나중에 올림픽금메달리스타가 되는 김광선(당시 한양공고)이 오광수(전남체고)에 패해 탈락하기도 했습니다.

고연봉은 파주에서 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왕십리체육관으로 가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복서로 성공했습니다. 요즘 세태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고연봉과 스파링을 자주했고, 1984년 MBC신인왕전에서 우승(주니어페더급)한 임종대(64년생, 보성, 원진체)는 “고연봉은 깔금한 폼에서 다양한 연타가 쏟아졌다”고 평했죠.

형인 고기봉은 동생의 성장가능성을 자신보다 높이 평가하고, 동생의 체육관회비와 장비 일체를 부담하는 등 심혈을 기울이며 후원했습니다. 고연봉을 지도한 김용석(58년생, 고창) 사범은 “고연봉의 권투는 친형 못지않은 대단한 파괴력을 지녔고, 당시 유망주였던 같은 체육관 소속에 세계랭커 손오공(62년생, 임실) 보다 훨씬 앞선 기량을 보유했다”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고연봉은 15전 13승(11KO)2패의 아마전적을 남기고 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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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봉 KPBF심판위원장과 유제두 관장, 고연봉 심판(좌측부터).


끝으로 이번 대회를 참관하면서 프로야구선수들의 몸값은 다이아몬드값인데 프로복서들은 껌값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돼 서글펐습니다. 작년 KBO 최고의 야구스타 양현종은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동안 총 3,225개의 투구를 기록했는데 공 1개 당 71만 원을 받았더군요. 그런데 이번 한국타이틀에서 유경종 챔프가 받은 파이트머니(실수령액)는 양현종이 던진 공 1개값보다 적었습니다. 이것이 10회전을 뛰는 한국 프로복서들의 현주소입니다. 1971년 동양챔피언 유제두가 1966년 방콕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인 이금택과의 경기에서 100만 원의 파이트머니를 수령했는데 당시 그돈이면 마포에 18평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죠. 당시 돈 100만 원이면 실업야구 특급선수들의 연봉을 상회하는 큰돈이었습니다. 참고로 프로야구가 태동하기 전인 1981년 최고연봉자는 한국화장품의 김봉연이었습니다. 보너스까지 연봉이 총 480만 원이었습니다.

끝으로 이번 대회에 해설자로 참관하신 한국복싱의 살아있는 역사이신 한보영(35년생, 남원)선생은 전주사범학교시절 배구선수로 활약했던 스포츠맨 출신입니다. 서라벌예대를 거쳐 MBC의 복싱해설위원, 서울신문, 스포츠서울의 편집위원을 지내셨고 얼마전 82세에 월간문예지에 단편소설작가로 문단에 등단했죠.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82세에 역작 파우스트를 완성했고, 버나드쇼는 93세에 엉뚱한 우화를 완성했죠. 늦은 출발은 없다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이 분은 지방으로 방송해설을 다닐 때마다 가방에 꼭 책을 넣고 다닐 정도로 독서광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가슴에 만 권의 책이 묻혀있어야 좋은 글과 그림이 나온다”고 역설했죠. 한보영 선생으로부터 좋은 글이 나왔으면 합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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