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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화영의 골프장 인문학 20] 일본 최고의 코스 히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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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노는 입구에서 100미터 이내에 클럽하우스가 위치한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세계 골퍼들이 가장 많이 검색하는 골프장 사이트 톱100골프코스(top100golfcourses.com)에서는 지난 2월 초순에 아시아 100대 코스를 처음 발표했다. 일본 고베에 위치한 히로노(廣野) 골프장이 1위였다. 이 코스는 세계 100대 코스에도 35위로 랭크되어 있었다. ‘대체 어떤 코스이기에 그럴까?’ 하는 궁금증을 감출 수 없던 차에 우연한 기회에 직접 라운드하고나서 단순히 코스 뿐만 아니라 이곳이 아시아에서 1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토미나가 씨의 품격
나는 이 코스를 지난주 목요일에 라운드했다. 65년째 회원이자 운영위원이기도 한 토미나가 유죠 씨가 초청해서 함께 라운드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나자 그는 “이틀 전에 라운드 하다 어깨를 삐끗했다”면서 “나는 골프 라운드를 못하니 한국에서 온 세 분만 라운드하시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엄격한 회원제 운영 원칙을 지키고 있어요. 내가 골프장 밖으로 나가면 여러분도 바로 이곳을 나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저는 여기 머물러 있을 테니 코스를 잘 돌아보세요.” 설마하니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4시간이 넘는 시간을 골프장에서 멀거니 기다린다고? 충격이었다.

70대 후반인 그는 부친으로부터 어린 나이에 철강 회사와 골프장 회원권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지금은 히로노 외에도 태국 최고의 회원제 코스인 아유디야링크스, 북아일랜드의 로열포트러시, 아일랜드 최고로 꼽히는 밸리버니언 코스 회원이라고 했다. 4군데 코스 회원권을 가지고서 겨울에는 태국, 봄,가을은 고베, 그리고 여름은 아일랜드에서 머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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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노의 회원 토미나가 씨가 라운드 전에 건투를 빌어주며 웃고 있다.


재벌에 해당하는 부자가 우리와의 약속을 위해 골프장에 아침부터 와서 4시간 넘게 기다려주었다. 처음에는 “티오프하는 것을 보고 골프장 사무실에 들러 자신은 잠시 쉬러 집에 갈까 협상해보겠다”고 말했으나 그건 우리의 미안함을 덜어주려는 그의 속셈이었다. 토미나가 씨는 우리의 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꼬박 골프장에서 기다렸다. 전반 홀을 돌자 9번 홀 옆 연습 그린에서 퍼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 후반 홀을 다 돌고나자 ‘자신은 이미 밥을 먹었다’면서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테이블에 앉아 함께 담소를 나눠주고 샤워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갔다.

70대 토미나가 씨는 그에게 금쪽같은 귀중한 시간을 왜 외국인을 위해 온전히 내어주었을까? 한국에서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재벌의 기기묘묘한 갑질들이 매일 뉴스로 쏟아져나오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니던가?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다. 그는 멀리서 소개받아 찾아온 생면부지의 외국인을 위해 그 같은 정성을 쏟았다.

일본어에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16세기 일본 다도(茶道)의 명인인 센리큐(千利休)가 했다는 말인데 뜻을 풀이하자면 ‘일생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로 차를 대접할 때 그런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우리를 대하는 그는 우리에게 귀한 차를 대접하듯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고 정성스레 대하는 품격을 가진 신사였다. 한국에 돌아와 감사함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메일을 보냈더니 “좋은 코스를 즐겼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 사람이 회원인 곳이 히로노다. “여기 회원은 8백명 정도인데 그중에 절반은 침대에 누워있어요.” 이곳은 종신제 운영 원칙을 지닌다. 본인 사망 이후에야 새로 회원권이 발급된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일제히 외쳤다. “회원 중에 가장 젊으신 거 아닌가요?” 그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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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니얼 양식의 클럽하우스가 특징인 히로노 골프장.


고베의 자긍심인 코스
히로노는 고베의 자긍심인 골프장이다. 1931년 고베시 상공인들이 중심이 돼 조성 공사에 착수해 1932년 6월에 개장됐다. 고베는 일본이 서양에 개방하고 근대화를 주도했던 항구였던 만큼 골프장이 일찍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랜 코스인 고베골프클럽도 히로노 근처에 있다.

코스는 마침 일본에 체류중이던 영국 설계가 찰스.H.알리슨이 설계했는데 약 1주일 만에 설계도를 완성했다. 공사는 100명 이상의 인부들이 달구지와 화차 등을 이용해 산림을 개간했다. 당시에는 포크레인 등의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다. 착공한 지 1년 반이 지나서 완공했다. 개장 후에는 아사카 일본 왕자가 기념 첫 플레이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알리슨이 만든 벙커는 턱이 가팔라서 일단 빠지면 핸디캡이 된다. 일본사람들은 알리슨 이름을 따서 ‘아리손’ 벙커라고 부른다.

히로노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시 폐쇄됐다가 1948년 6월 인코스가 재개장했고 이듬해 6월에 전 홀이 복구되었다. 숲이 빽빽한 가운데 호수가 둘러싼 코스는 홀마다 독립성이 높고 전략적이었다. 애초에는 티잉그라운드부터 그린까지 고려지(고라이시바)로 덮었으나 20여년 전에 그린은 벤트그라스로 교체되었다.

코스 스타일은 ‘내륙형 링크스’로 불린다. 개장 초기 전장 6725야드였으나 세 차례의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 7169야드로 늘어났다. 호수와 연못, 협곡과 계곡이 적절히 어울린다. 5번 홀(파3)을 ‘피오르드 홀’로 부르는 게 방증이다. 이 홀이 마치 노르웨이의 해안 지형을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런 애칭을 얻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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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3 5번 홀은 애초에 물이 들어왔으나 지금은 빠져나갔다. 그린 주변으로 벙커가 에워싸고 있다.


명 칼럼니스트 조지 페퍼는 568야드 15번 홀을 이렇게 평가했다. “왼쪽 도그레그 홀인데 코너를 따라서 거리를 줄이려는 시도가 50년 넘은 30미터 높이의 흑송(구로마츠)에 의해 제지당한다. 오른쪽으로는 세 개의 벙커가 비뚤어진 샷을 잡아챈다. 티에서 보이는 두 개의 협곡이 위협적이다. 첫번째 협곡이 샷을 막아서고 두번째 협곡은 보다 얌전한 편이지만 그린까지 가는 길을 막는다.”

골프작가인 존 사비노는 히로노의 후반을 극찬했다. “프랑스의 모폰테인, 미국의 파인밸리와 흡사하고 뛰어난 홀 배열(라우팅)과 독립적인 홀을 가졌다. 자그마한 엘리베이티드 그린, 전략적인 벙커, 더블도그레그를 넘겨야 하는 협곡은 샷을 막아선다. 엘리슨은 사람들의 환상을 활용했다. 파5 12번 홀은 핸디캡 1번으로 더블 도그레그 596야드의 뛰어난 홀이다. 거기서부터 15번 홀까지 4개 홀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전반은 널찍하면서 평탄하지만 후반으로 가면 그야말로 놀라웠다. 파3 내리막 13번 홀과 비탈진 언덕에 왼쪽으로 급격히 휘는 도그레그 14번 홀은 골프의 참맛을 느끼게 했다. 파3 17번 홀은 호수를 지나면 평화로운 동네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고요한 중에 라운드가 있는 다도(茶道)를 느끼게 하는 홀이었다.

골프장 클럽하우스는 19세기 콜로니얼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설계자가 영국인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골프장을 조성할 당시 세상의 분위기가 그랬다. 각종 식민지를 양산한 호주, 미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국 건축을 본따 지은 것이 콜로니얼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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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슨 벙커는 이처럼 파도가 솟구치듯 6번 홀 그린을 감싸고 있다.


클럽하우스는 지난 1957년 8월2일에 불타 없어지고 이듬해 5월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고베 북쪽 23킬로 시지미에 위치하는 이 코스는 지난 1995년 진도 7.2의 큰 고베 지진의 피해도 입었으나 지금은 여전히 건재하다. 클럽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동화속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아늑함을 주었다.

토미나가 씨는 ‘히로노가 내년부터 코스 리노베이션에 들어가 1년간은 문 닫을 예정’이라고 했다. 영국의 유명 설계가인 마틴 호트리가 와서 코스를 고치는데 주요 테마는 ‘백 투 베이직’이라고 했다. 80여년의 세월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숲을 잘라내고 1932년 개장 당시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리노베이션을 했는데 세계 순위가 안 올라가면 호트리의 잘못이니 우리가 그에게 엄청난 숙제를 안긴 셈이죠.” 그리고나서 재미나다는듯 웃었다. 장난꾸러기같은 일면이 읽힌 건 바로 그때였다.

에티켓이 중요한 골프장
히로노에서 라운드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에티켓이다. 골프장에 흔히 있는 코스 안내서를 들춰보니 구성이 독특했다. 한 면에는 코스 전장을 상세히 설명했고 다른 면에는 각종 라운드 예절을 설명하고 있었다.

‘골프는 커다란 자연 안에서 스스로 도전하는 스포츠지만, 그 골프는 통상 심판이 없다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플레이할 때는 기량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에티켓과 매너를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라운드 중에는 항상 동반 플레이어를 배려하기 바랍니다. 히로노 골프장은 독자적인 골프 매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경기할 때는 코스 에티켓을 따라 지켜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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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맵의 홀 소개 옆으로는 에티켓을 소개하는 내용이 책자 전체를 차지했다.


스코어카드를 펼치자 다시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휴대전화는 코스와 클럽하우스 안에서는 사용하지 말고 전원을 꺼두시기 바랍니다.’ 뒷장을 넘기자 그린에서 볼마크 수리하는 방법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의 경기를 도운 캐디는 그린에 오르지 못했다. 볼을 닦아주고는 클럽을 실은 풀카트를 끌고 다음 홀로 가버렸다. 그린에서는 골퍼들이 자율적으로 퍼팅하고 행동하라는 게 이 골프장의 룰이었다. 우리는 볼을 놓고 스스로 그린 라인을 살펴야 했고, 퍼트를 마친 사람이 깃대를 잡고 있다가 꽂고나서 다음 홀로 이동했다. 한국 대다수의 골프장은 캐디가 하지만 히로노는 그 역할을 골퍼에게 맡겼다. 몇 홀 지나다 보니 우리 스스로 그린 어느 구석에 내 볼 마크가 없는지 혹은 다른 이가 만든 마크가 없는지 살피고 수리했다. 스스로가 관리한 역사가 오래서인지 볼은 한 점의 튀김없이 빠르게 굴러갔다.

라운드를 마치고 짬 시간을 이용해 클럽하우스에 부설된 골프 박물관을 찾았다. 히로노가 처음 만들어져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역대 회장에서부터 초창기 사용하던 클럽들까지 다양하게 진열되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의 첫 번째 프로골퍼 연덕춘이 받은 이후로 소실되었다는 일본오픈 트로피까지 전시되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골프장을 나섰다. 바로 앞에 히로노골프장 철도 역사(驛舍)가 보였다. 골프장 입구에서 클럽하우스까지는 고작 100미터가 될까말까 한 거리였다. 물리적인 거리는 가깝지만 클럽하우스 입구를 들어서면서 히로노라는 전혀 색다른 골프 세상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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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 클럽하우스 내부는 고색창연했다. 오랜 역사속의 챔피언들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히로노는 코스에서 스스로 삼가고 남을 배려하는 골프의 정신 세계를 담아내고자 한 골프장이었다. 라운드를 마친 뒤에 골프백에 달린 금색의 골프장 로고 팻말이 그 모든 과정을 마친 이에게 주는 훈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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