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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미국의 삼총사, 바이런 넬슨-샘 스니드-벤 호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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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벤 호건.


미국의 삼총사 중에서 가장 팬이 많고, 인기가 높은 선수는 벤 호건이다. 호건의 볼 스트라이킹 능력은 ‘골프의 신’에 비견될 역사상 최고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호건은 세 선수 중에서 체격적인 조건도 가장 불리했다, 가장 늦게 대선수로 인정 받은 대기만성형의 골퍼였다.

꼬마캐디

1912년 미국 텍사스 주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호건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집에서 권총자살을 했는데, 호건과 가족들은 자살 후 현장을 목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를 잃은 호건은 신문팔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역에서 신문이 잘 팔리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많이 하면서 자기가 싸움을 꽤나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세 때 캐디를 하면 신문팔이보다 훨씬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고는 골프장을 찾아갔다. 먼저 캐디가 된 아이들은 왜소한 체격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호건의 등장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캐디가 많아지면 일을 받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덩치 큰 아이들이 싸움을 걸었는데 이내 그들은 주먹으로 호건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호건의 라이벌이었던 바이런 넬슨이 캐디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잘 생긴 얼굴과 싹싹한 성격 때문에 모두가 그를 환영해 주었다.

캐디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골프를 배우던 호건은 장타 시합을 하게 되었다. 저녁 때 꼴찌가 연습장의 공들을 모두 주워오는 고된 일을 하는 내기였는데, 체격이 작은 호건은 낮은 훅을 쳐서 공이 많이 굴러가게 하는 요령을 터득해 꼴찌를 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때에 스윙 했던 감각이 훅의 DNA로 몸에 남아서 평생 동안 호건을 괴롭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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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건의, 힘이 넘치는 완벽한 백스윙.


무명프로


캐디 생활은 15세까지만 가능했기에 이후 호건은 아마추어 골프대회에 참가했다. 우승을 한 번도 못해 보고 1930년 만 18세가 채 되지 않아서 프로로 전향했다. 무명의 프로 생활은 삶을 위한 투쟁이었다. 레슨이나 프로샵에서 돈을 모아 프로 투어에 참가하면 몇 경기 만에 가진 돈을 모두 쓰고 빈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라이벌 바이런 넬슨은 1935년 PGA 첫 승을 올렸고, 1937년 마스터스까지 우승하며 스타가 되었다. 다른 동갑내기 라이벌 샘 스니드는 1937년 PGA 5승, 1938년에는 8승을 올리며 상금왕에 올랐다.

호건은 서서히 지쳐갔다. 이제 골프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선두권에 있어서 우승의 희망을 가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훅이 나오면서 타수를 까먹고 2위가 되었다. 미디어는 호건에게 ‘미스터 준우승’ 이라는 딱지를 붙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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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호건의 백 스윙.


단 한 번 받아본 골프 레슨


호건은 평생 동안 스윙레슨을 받지 않고 혼자서 자기의 스윙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쳤던 훅의 문제점을 고칠 수가 없었다. 1939년 호건은 결국 선배 프로인 헨리 피카드를 찾아가서 레슨을 요청했다. 피카드는 호건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며 호건이 파산의 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도움을 주는 등 호건의 멘토였다.

피카드는 호건의 그립이 너무 강하여 훅이 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호건의 왼손 그립을 왼쪽으로 돌려서 약하게 잡도록 교정해 주었고, 스탠스도 약간 넓혀서 오픈 스탠스를 취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피카드의 단 한 번 레슨으로 훅 문제는 신기하게 해결되었고 이제 호건은 더 자신 있게 드라이버를 스윙할 수 있었다.

프로 10년 만의 첫 우승

프로 10년차가 된 1940년 초의 텍사스 오픈에서 호건은 마지막 라운드에 66타를 치면서 클럽하우스리더가 되었고, 동료 선수들은 드디어 우승을 했다며 축하인사를 했다. 그러나 호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축하 악수를 거절하고 긴장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부터 2등만 5번을 했는데 이번에도 누군가 나타나서 자기의 우승을 저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다. 호건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호건과 동타가 된 선수가 나타났는데 바로 바이런 넬슨이었다. 다음날 연장전 18홀에서 호건은 넬슨을 넘지 못하고 2등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벤 호건의 우승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1940년 3월 드디어 첫 우승이 찾아왔다. 10년을 기다린 호건에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3주 연속 우승이 찾아온 것이다. 우승을 하기 전에 바이런 넬슨이 호건에게 맥그리거 드라이버를 선물했는데 호건은 첫 스윙을 하면서 그 드라이버가 특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 드라이버로 무장한 호건은 페어웨이를 놓치는 일이 없었다. 3주 연속 우승하는 동안 12라운드에서 34언더 파, 더 놀라운 것은 216홀 동안 그린을 두 번밖에 놓치지 않았던 신의 경지와 같은 샷들이었다.

1940년 4승을 한 호건은 상금왕에 올랐고, 첫 번째 전성기를 구가했다. 1941년 5승, 1942년 6승을 하며 3년 연속 상금왕이 되었는데 1943년부터 세계대전으로 인해 PGA 투어 대회가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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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볼 스트라이커인 벤 호건의 매직 무브먼트. 오른쪽 팔꿈치가 옆구리에 붙어있고 왼쪽팔보다 훨씬 낮은 위치를 유지한다.


메이저 대회 첫 우승과 두 번째 전성기


PGA 투어 20승을 넘겼지만 호건은 아직도 메이저 대회의 우승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1942년의 전성기 때 마스터스에서 바이런 넬슨과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다. 1946년 마스터스에서는 4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3퍼트를 범하며 우승컵을 놓쳤고, 1946년 US 오픈에서도 마지막 홀의 3퍼트로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이런 호건은 1946년 PGA 챔피언십에서 드디어 첫 메이저 우승을 차지했다. 1946년에 32개의 대회에 참가한 호건은 우승 13회, 2위 6회의 성적으로 상금왕이 되었다. 1947년 7승, 1948년 US 오픈과 PGA 챔피언십을 포함해서 10승을 올리며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했다.

호건의 시합 결과를 지켜본 동료 선수들은 이제 호건이 스윙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믿게 되었지만 비밀은 없었다. 동료들보다 훨씬 길었던 연습시간이 비밀의 전부였다. 1949년 1월 타임지의 표지모델이 된 호건은 기사에서 “경쟁자들보다 더 잘 칠 수 없다면 그들보다 연습을 더하라”라고 비밀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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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US 오픈, 메리온 골프클럽 마지막 홀의 어프로치 샷 장면. 이 사진은 골프 스포츠 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선정됐다.


운명의 자동차 사고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호건의 우승행진은 10톤짜리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의해서 정지되었다. 1949년 시즌 초반에 2승을 올린 호건은 2월 1일에 피닉스오픈을 마치고 텍사스의 집으로 운전하여 돌아가던 중 안개 낀 고속도로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와 정면 충돌했다. 호건의 왼쪽 다리 뼈, 골반 뼈, 갈비 뼈 등 11개의 뼈가 부러졌고 머리는 앞쪽 계기판 보드에 충돌했다. 운전석에 탄 부인은 큰 부상이 없었는데 앰블란스가 오기까지 90분이나 걸렸고 호건은 기절했다가 깨어날 때마다 자기의 골프클럽이 무사한지를 물었다.

입원 후 담당의사가 언론 인터뷰를 했는데 호건이 다시는 골프를 칠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걷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소견을 발표했다. 팬들은 이제 호건의 골프가 끝난 것을 알고 진심으로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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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라이벌 바이런 넬슨(오른쪽)과 함께 한 호건.


드라마 같은 부활

두 달 후 집으로 돌아간 호건은 재활운동을 시작했고, 사고 후 7개월 만에 처음으로 골프샷을 해 보았다. 호건이 연습을 못하고 누워있는 동안에도 마음 속으로 수만 번의 이미지 스윙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12월에 카트를 타고 처음으로 18홀을 플레이한 벤 호건의 샷은 왼발로 체중이동을 완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빼고는 전성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1950년 1월 LA 오픈으로 컴백한 호건은 왼쪽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밴드로 탄탄히 감고 걸어야 했다. 메리온 골프클럽에서 열린 US오픈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사투를 벌이며 우승을 했는데 역사가들은 이 우승을 ‘메리온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PGA는 1950년에 US 오픈 우승으로 단 1승 밖에 올리지 못했던 호건에게, 10승의 샘 스니드를 제쳐두고, 올해의 선수상을 수여했다.

호건은 사고 이후 출전횟수를 연간 5회 정도로 제한해야 했지만 1951년에도 마스터스와 US 오픈에서 우승하여 메이저 6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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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그린 자켓을 주고 받는 벤 호건(오른쪽)과 샘 스니드.


1953년 메이저 3승의 호건 슬램


1952년 겨우 3개 대회에 출전하여 1승을 했던 호건의 왼쪽 시력은 점점 더 나빠졌고, 퍼팅능력도 따라서 저하됐다. 미디어에서는 40세를 넘긴 호건의 커리어가 거의 끝나간다는 의견이 많았고, 조심스럽게 은퇴를 예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건에게 생애 최고의 영광은 41세인 1953년에 찾아왔다. 마스터스, US 오픈, 디 오픈을 모두 우승하는 업적을 만들어 낸 것인데 역사에서는 이 업적을 ‘호건 슬램’이라고 부른다.

마스터스, US오픈, 디오픈을 한 해에 우승한 선수는 호건 이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호건의 디 오픈 우승은 아홉 번째 메이저 우승이며 그의 마지막 메이저 우승이었고, 진 사라센 이후 두 번째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업적을 완성시킨 우승이었다. 디 오픈 우승 후 뉴욕항에 도착한 호건은 색종이가 날리는 속에서 카 퍼레이드 환영식을 받았는데 역사상 카퍼레이드를 받은 선수는 보비 존스와 벤 호건뿐이다.

호건은 자동차 사고 이후 메이저대회에 9번 참가하여 6승을 올리는 발군의 성적을 올리며 결국 미국의 삼총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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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골프 삼총사의 후계를 이어 받는 아놀드 파머와 함께.


불후의 스윙교본 '파이브 레슨스(Five Lessons)'

호건은 골프레슨 분야에서 불멸의 베스트 셀러를 집필함으로써 이 분야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선수가 됐다. 호건이 1957년에 발간된 스윙교본의 제목은 ‘파이브 레슨스’이다. 호건의 스윙을 해부하여 그림으로 설명한 이 책은 겨우 120페이지의 적은 분량이지만, 아직도 골프 스윙 교본 중에서 성경이나 다름 없는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골프 스윙코치나 지도자, 또는 진지한 아마추어 골퍼라면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는 이 책을 꼭 한 번 읽을 것을 권한다.

1912년에 태어나서 PGA 대회에 292회 출전하여 64승을 했고 톱3 139회, 톱10 241회를 기록했던 ‘골프의 신’ 벤 호건은 1997년 85세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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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골프교본 '파이브 레슨스(Five Lessons)'.



* 박노승 : 건국대 산업대학원 골프산업학과 겸임교수,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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