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원씨는 결혼했어요? “이혼했어요. 저 싫어서 헤어졌는데 위자료도 안 받고 아들은 남편이 키워요.” “남자친구는 있어요?” “없어요, 일하느라 바빠서” “…그럼 생리적인 문제는 어떻게…” “필용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내가 편치 않으니…” “그래서 집사람이 돈 주고서라도 해결하라는데 막상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할 수 없어요”. 극중 한지의 역사와 현재를 취재하는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 민지원(강수연)과 필용은 한지 복원 프로젝트 논의차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문득 휘영청 밝은 달빛 속으로 차를 몰아 나온다.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다.
#3 지원의 다큐멘터리 촬영이 끝나고 필용은 지원의 집을 방문해 편집본 확인차 TV를 켠다. TV에선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는데, 필용이 지원을 안는다. 두 사람의 몸이 포개지고 다큐멘터리 화면을 남녀의 가쁜 숨소리가 덮는다.
거장 감독은 왜 이처럼 비루한 (성적) 욕망을 한 치 꾸밈이나 덧칠함 없이 알몸인 채 그대로 고고한 달빛 아래로 드러냈을까. 만약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17일 개봉)를 “잊혀지거나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한지가 가진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찬미하는 작품”이라고만 한다면 영화에 대한 배신이거나 거짓말일 것이다. 임권택의 삶이 그래왔고, 그의 영화가 그려왔듯 예술과 아름다움은 늘 통속적이고 비루한 삶과 욕망이 끓고 불타오르다 사그라지는 그 자리에서 피어오른다. ‘달빛 길어올리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은 실제 한지 복원과 조선왕조실록 복본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전주시의 제안으로 101번째 영화인 ‘달빛 길어올리기’를 만들었다. 임 감독은 사업에 투입된 전주시청 공무원의 시선과 발걸음을 따라가며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가진 욕망을 마주하고, 그것 너머에 있는 한지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까지의 이야기를 담는다. 필용이 만나는 지장(종이를 만드는 장인)들은 지원금을 한 푼이라도 더 타내기 위해 서로 헐뜯고, 모함하고, 멱살을 잡기 일쑤다. 필용의 아내 효경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유는 필용이 과거 바람을 폈기 때문이다. 필용이 업무차 지원을 만날 때도 효경은 둘의 관계를 의심하고 추궁한다. 필용은 필용대로 학창시절 자신보다 못 났던 친구가 상사라는 이유만으로 굽신거려야 하는 추레한 처지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이렇듯 누추한 삶들이 이루는 통속극과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병치시킨다. 한지의 역사와 우수성은 TV다큐멘터리로, 지장이나 서예가의 설교로,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불쑥 불쑥 끼어든다. 통속극과 다큐멘터리의 접점에는 한지의 명장이었던 조부와 아버지의 대를 이은 지공예가였으며 지금은 고향과 뿌리를 잃어버린 필용의 아내 효경이 존재한다. 스크린의 안과 밖, 카메라의 앞과 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축제’나 ‘춘향뎐’과 맥을 잇는다. 임권택 감독이 시도한 첫 디지털 영화일 뿐 아니라 스스로 표현하기를 “과거의 것들과 결별한 데뷔작”이라고 칭하는 도전과 실험이 그 어딘가쯤에 있다.
임권택이 통속적 욕망과 회한으로 빚고 달빛으로 길어올려 뜬 한지에는 삶의 무늬와 천년으로 상징된 영원을 향한 욕망이 결결이 엮여있다. 극중 한 명필가는 “화선지는 먹을 쉽게 흡수해 필력이 없는 붓도 필력이 있는 것처럼 농간을 부리지만 쉽게 퇴색하고 갈라지며 부서진다”며 “한지는 먹을 뱉어내듯 쉽사리 빨아들이지 않고 붓의 흔적과 필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정직한 종이로 보존력과 내구성이 우수하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엔 ‘천년의 한지’를 만들기 위해 필용과 효경, 지원 그리고 노승과 퇴물 장인 등 저마다 상처와 욕망덩어리인 이들이 달빛 아래 폭포로 모두 모인다. 영화라는 ‘농간’에서 길어올린 거장의 ‘명장면’이다. 박중훈과 강수연, 예지원, 그리고 장항선과 안병경은 이 풍경 속의 주인공들로서 손색이 없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