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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하루 장미리로 살아보기…’미스 리플리’의 삶
오늘 하루 장미리(‘미스 리플리’)로 살아보기로 한다.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그녀의 삶이다. 우리는 그녀를, 이 드라마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1. 나는 장미리다. 나는 고아가 아니다. 어린시절 엄마는 나를 버렸지만 다시 오리라고 믿었다. 쫓겨가다시피 뿌리내린 그 곳에서 나는 고아였다. 입양을 갔다. 가기 싫다고 울부짖고 상한 우유를 마셔 배탈이 난 희주를 대신해서다. 싫었다. 나는 고아가 아닌데 엄마를 떠나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섬나라로 가야했다. 배가 아프다는 희주는 아무리 불러도 나와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섬나라로 보내졌다. 하루에 이불 50채를 빨았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 독을 품고 버틴 가슴엔 가시가 돋히기 시작했다. 발길은 유흥가로 흘렀다. 선택의 여지도, 판단의 기준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돈을 벌고 싶었다. 나도 잘 살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곳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이만큼 했으니 이제 한국으로 갈 수 있다. 나를 버린 부모님의 나라로. 

장미리는 유리처럼 차고 투명한데, 어느 순간 비에 젖은 강아지꼴이 되고 만다. 붉은색 가발을 벗어던진 그녀가 한국으로 첫 발을 디뎠을 때 시청자들은 보았다. 대놓고 학벌을 갈구하고, 뻔뻔하게 환경을 요구하는 천박한 이 사회의 단면을 말이다. 장미리는 단지 ‘지나가는 행려병자’에 불과했다. 그녀의 ‘영혼 속으론 언제나 산성비가 내렸고 가끔은 이유없이 개들이 사납게 달려들어 살점을 물어뜯기도 했다(이외수, '청춘불패' 중)’.

시점은 이 곳이었다. 반반한 외모는 결국 독이 됐으나, 때로는 그 독을 활용할 줄 아는 '비틀어진 욕망'을 키운 것, 사소히 내뱉었던 "동경대 출신이면 뭐가 달라지나요"라는 말은 말을 덧대 거짓과 욕망의 산을 이루기 시작한다.

드라마 ‘미스리플리(MBC)’는 1, 2회 방송분에서 탄탄한 주조연 배우들과 신정아 스토리를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안방을 공략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빠른 전개와 이다해의 연기는 상당히 괜찮았다. 드라마는 장미리라는 한 여자를 통해 거짓말과 진실, 사랑과 배신, 욕망을 말하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 장미리의 연기는 중요했다. 이 때까지 이다해의 연기도 합격, 스토리 라인도 합격이었다. 이후 자극적이거나 뻔한 전개가 예상됐음에도 그렇다. 

#2. 이제서야 사는 것 같다. 거짓으로 학력을 말하니 나를 보는 세상이 달라졌다.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들킬까 조마조마했고 다시 무너질까 두려웠다. 다행히도 매번 무사히 넘어갔다. 장 이사의 마음도 얻었다. 나는 날고 싶었다. 거짓으로 만든 삶이라 할지라도 나도 그렇게 살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그런데 죽기보다 싫은 순간이 왔다. 히라야마다. 그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나를 다시 그 곳으로 밀어넣으려 한다. 이번엔 싫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도 살고 싶다. 호텔 A의 장 대표보다 모회사 몬도그룹의 송유현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미 오래전 내게 마음을 뒀다. 이제 내 차례다. 나는 어떻게든 이 남자를 가져야 한다. 가장 밑바닥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동경대 출신’이라는 거짓말을 시작한 장미리의 삶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동경대 출신이라는 거짓을 사실로 지키기 위해 진짜 동경대 출신인 고아원 동기 희주(강혜정)의 졸업증명서를 몰래 가져다 위조한다. 호텔 내 학력위조가 문제시되자, 위기 모면을 위해 ‘장 이사(김승우)’의 마음을 훔친다.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장 이사의 마음에 달렸다’고 떠드는 호텔직원들의 대화를 엿들은 뒤부터다. 그렇다고 장 이사를 온전히 믿을 순 없었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장 이사의 방에서 학력 확인 팩스를 빼내 직접 위조한다. 이 때 장미리의 눈빛은 꽤 성실하다. 이제 장미리는 '야망의 날개'를 달았다. 거짓으로 마음을 얻고 그것으로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 거짓된 마음은 두 사람 사이의 줄타기로 이어진다. 또 한 여자 문희주는 이 관계에 얽혀있다.

드라마는 여기에서 거짓과 진실, 사랑과 우정을 말하기 시작한다.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장미리는 더이상 밑바닥의 삶이 싫다. 히라야마를 만난 이후 장미리의 어설픈 연극들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불안한 눈빛과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식의 임기응변은 보는 사람들도 실소케 한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냐는 심보다.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자, 진심이라 믿고싶은 자들에게는 장미리의 모든 것이 ‘진실의 탈’을 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은 장미리의 유혹에 왜 남자들은 쉽게 넘어가느냐는 점. 장미리의 과거를 떠올려보자. 수많은 남자들을 상대했던 ‘술집 접대부’ 출신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니 '맞춤형 공략법'과 '미인계'라는 두 단어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사랑의 쟁취’에 안주할 수만은 없다. 눈에 띄게 4각관계로 접어들며 치명적인 사랑의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배회할 이들 남녀(김승우, 강혜정)는 ‘진심’을 화두로 어느샌가 ‘장미리 벗기기’의 선봉에 서게 될 지도 모르겠다. 

장미리의 거짓말은 흔히 ‘설득력과 개연성의 부족’이라는 반응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접대부 출신의 장미리가 더 높은 세계로 무임승차하기 위해 ‘꽃뱀’으로 변신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장미리의 살기 위한 투쟁’이 가장 설득력을 잃어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악에 받쳐 살아남고 독을 품고 견뎌왔던 과거와는 달리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아무런 노력없이 새로운 세상에 편승하려는 심리, 자신은 이만큼 힘들었으니 나의 그 힘듦을 보상받기 위해 이정도 거짓과 악행은 괜찮다는 어리석은 이분법이다.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일을 ‘그럴 수도 있겠다’고 믿게 만들기에는 스토리의 농도 조절과 배우들의 연기력이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이다해의 능란한 연기력에는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거기에 ‘의도된 만남’들 안에서 빚어지는 관계들이 이 절박한 세계 안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표출될지는 드라마가 끌어갈 스토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설명의 부재'는 엉성한 스토리라인만을 노출시킬 뿐이다. 현재까지 6회, 빠른 전개는 지루함이 없으나 뻔하고 어설픈 전개는 흥미를 떨어뜨렸다. 12.7%(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전국 시청률, 동일 시간대 방영된 또다른 거짓말 여성의 성공스토리 ’동안미녀(15.8%)’에 1위 자리를 기꺼이 내줬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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