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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년반 남은 대선, 여론조사 1위의 운명은?
오는 7월 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당 대표가 선출되면 정치권은 본격적으로 내년 12월 대통령 선거 체제에 돌입한다.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는 신임 당 대표가 내년 총선과 대선 관리의 중책을 맡기 때문이다.

아직 1년 반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전당대회를 계기로 차기 대통령을 가리는 대선 레이스의 막이 사실상 오르는 것이다.

현재 대선 관련 각종 여론조사의 맨 앞줄에는 30%대의 탄탄한 지지율을 자랑하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서 있다. 이 때문에 야권의 선두주자인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짝을 맞춰 벌써부터 ‘박근혜-손학규 1대1 대선구도’를 기정사실화하는 정치권 호사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과거 대선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15~17대 대선을 뒤돌아보면, 선거를 1년 반 가까이 남겨둔 상황에서 여론조사 1위에 오른 인물들은 예외 없이 대선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15대 대선을 한 해 앞둔 1996년. 당시 여론조사 1위는 ‘무균질’ 이미지를 앞세운 박찬종 신한국당 후보였다.

모 일간지가 그해 10월에 실시한 신한국당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박찬종 후보는 29.9%, 이회창 후보는 26.2%를 기록했다. 그 뒤로 이인제, 이홍구 후보 등이 한자릿수 지지율로 추격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 수치는 해를 넘겨 1997년에 이르면 크게 변하게 된다.

1996년 말 노동법 날치기로 인해 신한국당 내의 주도권이 민주계에서 민정계로 넘어가면서 이회창 후보가 선두주자로 부각됐고, 박찬종 후보는 당내 지지세 결집에 실패하며 중도 낙마로 레이스를 접어야 했다.

여론조사 1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회창 후보도 아들 병역 문제에 가로막혀 결선 레이스에서는 김대중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16대 대선을 앞둔 2001년 하반기. 당시의 대세 역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였다. 이 총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40%가 넘는 지지율을 얻으며 여권의 어떤 인물과 상대해도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총재의 대세론은 해를 넘겨 대선 당해연도인 2002년 초반(이회창 50%대 지지율)까지 이어져 청와대 무혈입성을 예고했다.

그러나 민주당 경선에서 극적인 승부를 연출한 노무현 후보가 ‘노풍’을 일으키면서 대선판세의 지지율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3월 말 이후에는 두 후보의 각축전이 펼쳐졌다. 결국 그해 대선은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이뤘다가 선거를 하루 앞두고 파국을 맞았지만 노 후보의 역전 드라마로 끝이 났다.

17대 대선을 한 해 앞둔 지난 2006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청렴 이미지로 높은 평가를 받은 고건 전 국무총리가 선두를 달렸다. 30% 안팎의 지지율로 범여권 후보를 대표하던 고 전 총리는 그러나 그해 10월 북한의 핵실험을 기점으로 야당의 이명박 후보, 박근혜 후보에게 차례로 1위 자리를 내줬다. 급기야 2007년 1월에는 지지율 급락 여파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7대 대선 승리 역시 여론조사 후발 주자인 이명박 후보의 몫이 됐다.

이처럼 15~17대 대선만 놓고 보면 대선 한 해 전에 형성된 여론조사 1위의 수혜자는 대선 필패 또는 중도 낙마하는 징크스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여론조사의 속성인 거품 인기의 한계와 엄격한 검증의 관문, 시대정신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1996년의 박찬종 후보와 2006년의 고건 전 총리의 경우가 대표적인 거품 케이스였다고 본다.

이들의 인기몰이는 정치권 전반에 대한 혐오가 커지면서 여권과 야권 지지층 양쪽으로부터 얻은 반사이익에 근거한 지지율이어서 선거구도가 제대로 짜이면서 순식간에 꺼졌다는 설명이다.

두 사람 모두 깨끗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짧은 시간에 지지율을 쌓았지만 충성도가 낮은 허약한 지지율이었던 셈이다.

이회창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가려내기 어려운 검증의 관문에 막혀 꿈을 펼치지 못한 경우다. 1997년 대선에서 뜻하지 않은 아들의 병역 문제가 터져나왔고, 그해 5월 최대 57.7%까지 솟구쳤던 이 후보 지지율은 8월부터 10%대로 떨어지더니 10월엔 13.5%로 곤두박질쳤다. 2002년에는 민주화 확산의 시대정신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패배의 빌미가 됐다.

그렇다면 이번 18대 대선에도 과거와 같은 ‘대선 D-1년’ 징크스가 적용될까.

이와 관련,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율을 분석해보면 박찬종 전 의원, 고건 전 시장 등의 경우와 달리 매우 지속적이고 견고하다”(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거나 “과거 여론조사 1위에 오른 인물들과 달리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은 압도적 1위라는 차이가 있다”(여권 핵심 관계자)는 평가가 많다.

과거와는 정치 지형은 물론 여론 지지율의 추이와 질적인 측면 모두가 다르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야권이 어떤 후보를 내느냐에 따라 이회창 대세론 때와 같이 박빙의 싸움이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친이계 인사)는 지적도 없지 않다. 대선 가도에 수없이 등장한 북한 변수와 제3의 인물 등장 등이 새로운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손학규 대표가 최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주최한 포럼에서 “양자(兩者) 구도로 가면 달라진다. 다음 대선은 ‘51대49’의 게임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야권의 또 다른 관계자는 “대선은 그야말로 마라톤”이라며 “42.195km를 뛰면서 처음부터 선두로 치고나간 주자가 골인점을 1위로 통과하기는 쉽지 않다. 막판 스퍼트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1987년 직선제 선거 이후 여론조사 1위의 대세론이 끝까지 먹혔던 선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3당 합당의 여세로 대세론을 밀어붙여 최종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박 전 대표 진영에서는 ‘어게인 1992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야권에서는 여론조사 1위 징크스가 18대 대선에서도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양춘병기자@madamr123>

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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