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의 계절 8월과 함께 본격적인 휴가시즌이 돌아왔다.
휴가와 방학은 일에 치인 직장인과 공부에 주눅이 든 학생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시간. 주말도 없이 연일 국정에 매달려야 하는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직장인들이 휴가를 재충전의 기회로 활용하듯, 대통령도 휴가기간 동안 취미 활동을 벗 삼아 모처럼 여가를 즐긴다.
역대 대통령은 주로 정치 휴지기인 ‘7말8초(7월 말~8월 초)’에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휴가를 떠났다.
일반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통령은 경호 안전이 보장되는 ‘특별한 곳’을 찾아 국정 현안에 관한 ‘특별한 구상’을 한다는 것이다.
▶군 시설, 별장 찾아 정국구상=이승만 전 대통령은 강원도 화진포 별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남 진해의 저도를 주로 찾았다. 저도는 별장으로 사용하던 청해대 본관이 있는 섬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여가로 낚시를 즐겼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휴가지에서 수영하는 사진들이 남아 있다.
1983년 충북 대청호 주변에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가 생긴 후 전두환 전 대통령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주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가족, 경호실 직원들과 함께 축구를 즐겼고, 싱글에 가까운 골프실력을 자랑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골프 삼매경에 빠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날마다 2㎞씩 조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산책이나 서예로 여가를 보냈다.
이후 권위주의 탈피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별장을 전면 개방하면서 청남대 시대는 막을 내렸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에는 대전 군 휴양지, 2005년에는 강원도 용평을 다녀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3년간 진해의 해군 휴양소에서 테니스와 낚시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마냥 휴식만 취한 것은 아니다.
‘청남대 구상’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역대 대통령들은 휴가기간 중 여가를 즐기면서도 정국 구상을 빼놓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휴가기간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휴가기간을 국정운영 철학을 정리하고 연설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도 개각과 청와대 개편, 8ㆍ15 기념사 등 국정의 큰 틀을 휴가지에서 구상했다.
▶국내 대통령 3~7일, 해외정상 2, 3주~한 달=문화적 차이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대통령과 외국 정상들과의 휴가 기간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통상 3일에서 길어도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다. 대통령의 법정 휴가일 수(21일)가 무색할 정도다. 2006년 6월 말 서울시장 퇴임 이후 단 한 차례도 휴가를 다녀오지 못한 이명박 대통령도 취임 이후 평균 5일 정도 휴가를 다녀오는 데 그쳤다. 이마저도 참모들이 등을 떠밀다시피해서 겨우 성사됐다. 이 대통령은 방송 좌담회에서 “내가 일하면 많은 사람이 일해야 된다. 괴롭다”면서도 “10년 후쯤이면 (우리 대통령도 외국정상들처럼) 그리될 거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기초를 닦아 발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휴가를 아예 반납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유독 여름휴가와 인연이 적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에는 탄핵사태로, 2006년과 2007년에는 각각 아프가니스탄 피립사건과 경제위기로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취임 첫해 경제위기를 이유로 휴가를 떠나지 못했고, 임기 마지막 해에는 아들 문제로 별도 계획없이 관저에 머물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6년 수해로 인해 휴가를 취소하고 수해현장 방문과 군부대 시찰로 시간을 보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첫해 휴가를 떠나긴 했지만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를 주권 미지정 암석으로 표기한 문제가 발생해 사태 수습에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올여름도 중부지방 폭우가 장기화하고 있어 이 대통령이 휴가 일정을 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는 4년 동안 336일 휴가=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 주요국 정상들은 국정을 뒤로 한 채 최소 2~3주, 길게는 한 달 정도 휴가를 즐긴다. 휴가지도 다양하다. 유럽의 정상들은 가족들과 함께 모리셔스, 마요르카 등 국경 넘어 유명 휴양지로 훌쩍 떠난다.
‘휴가전문 대통령’으로 불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집권 1기 4년 동안 무려 336일을 휴가로 보냈다. 여름에 4~5주, 겨울에 2~3주의 공식 휴가를 보내고 추수감사절 등 연휴를 꼬박꼬박 챙긴 결과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가 지도자가 휴가를 가도 국정이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것이 선진국”이라며 “우리나라의 경우 민심, 국민정서가 아직은 대통령의 장기 휴가를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대통령의 휴가=장기 휴가가 관행처럼 정착된 외국 정상들도 간혹 ‘잘못 떠난 휴가’로 곤경을 치르거나 휴가를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지난 2009년 취임 후 첫 연말휴가를 하와이에서 조용하게 보내려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휴가계획은 25일 여객기 폭파기도 사건으로 여지없이 깨졌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2007년 사업가 친구 소유 전용 제트기를 이용해 호화판 휴가를 떠났다가 구설에 올랐다.
당시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집트로 휴가를 떠나면서 억만장자 사업가 뱅상 볼로레 씨 전용기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나 비난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악의 사례로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첫손에 꼽힌다.
부시 대통령은 2005년 휴가를 보내느라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 복구에 늑장대응,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도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미군의 페르시아만 배치가 진행되던 즈음인 1990년 8월 메인 주 케네벙크포트 여름 별장에서 골프와 낚시를 즐기다 큰 비난에 직면했다.
이 밖에 빌 클린턴 대통령은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 대사관에 대한 테러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공격을 벌일 때 마사의 포도밭에서 휴가 중이었다.
이 때문인지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재정적자 감축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여야 의원들에게 올 여름휴가를 같이 취소하자는 이례적인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양춘병 기자@madamr123>
yang@heraldcorp.com
청남대에서 모처럼 휴가를 즐기는 역대 대통령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조용하게 사색과 서예를 즐겼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위를 벗고 일반인처럼 즐겼다. [헤럴드경제 DB]
<대통령휴가의 단골메뉴...독서>
“독서를 하며 정국을 구상할 계획입니다.”
대통령 휴가기간이 되면 청와대 대변인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밝히는 교과서적 답변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취미 활동으로 소일하면서도 독서만큼은 휴가목록에서 빠뜨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휴가철이 되면 대통령이 읽는 책이 세간의 관심을 끌곤 한다. 대통령이 손에 쥔 책을 통해 대통령의 국정철학의 자양분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책은 정치적 이미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보도에서 “대통령과 대선후보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고려해 깊이가 있으면서도 대중과 친숙한 주제의 책을 고르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저마다의 독서스타일을 갖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서적을 ‘속독’하기로 유명하다.
성공신화를 이룬 CEO 출신답게 달리는 차 안에서 30여분 만에 책 한 권을 해치우거나 필요할 때에 해당 서적을 골라 읽는 유형이다. 이 대통령은 경제마인드가 강해 교양서적보다 잭 웰치나 피터 드러커 등의 경제경영서적을 주로 탐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휴가 때는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담긴 e-북을 지참해 젊은 감각을 자랑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에게 직접 책을 추천하고, 책 내용을 정부 정책기조로 삼는 등 ‘독서 정치’를 즐겼다.
공동체적 삶의 질을 꿈꾸는 ‘유러피안 드림’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까지 책상에 놓여 있던 책이었다.
독서량과 질에 관한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6년여 감옥 생활을 통해 독서법을 터득한 김 전 대통령은 현미경으로 사물을 살피듯 ‘정독’을 하는 스타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1시간 읽고 1시간 생각하라”는 조언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은 주로 정치 관련 서적을 핵심내용 위주로 읽는 목적형 독서가였다.
이 밖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 번 마음에 든 책은 여러 번 읽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숙독’을 즐겼다. 박 전 대통령은 10살 때 나폴레옹 전기를 처음 읽은 후 대통령이 된 뒤에도 다시 꺼내 읽을 정도였다.
<양춘병 기자@madamr123>
ya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