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국 문제로 급전 필요때
투자자산 회수에 안성맞춤
세계증시보다 더 큰 하락폭
대응은 한결같이“ 외인탓”
시장구조개선 정책은 뒷전
규제낮춰 장기자금 유입촉진
국내자금 투자역량 높여야
2008년 9월에도, 지난 8월에도 우리 증시는 세계 증시보다 더 크게 출렁였다.
그럼에도 국내 여론의 대응은 한결 같다. 3년 전인 리먼 때와 다름없이 증시에서는 또다시 ‘나쁜 외국인론(論)’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의 펀더멘털은 튼튼한데, 외국인들이 증시를 흔들고 있다는 요지다. 하지만 외국인 주도의 시장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들은 지난 3년간 별로 이뤄지지 못했다.
얼핏 3년 전 리먼사태 때보다 한국증시에 대한 외국계 자금의 영향력은 더 세진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외국인들의 국내 주식 보유 비중이 28%였으나 지금은 31%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의 한국 주식매도는 2007년부터 본격화됐다. 2006년 말 외국인의 코스피 비중은 37%로 현재보다 9%포인트 이상 높았다. 비중으로만 따지면 외국인 영향력은 더 약해진 게 맞다.
그런데 비중이 줄었다고 영향력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외국인의 영향력을 좌우한 것은 보유비중이 아니라 한국 국내 자금의 글로벌 경제현상에 대한 이해부족이었다. 1997년에는 헤지펀드가 뭔지도 모르고 당했다. 2007년 2월 서브프라임 문제가 처음으로 불거졌을 때도 외국인들은 한국 주식매도로 대응했지만, 국내 전문가들은 “프라임 모기지까지 전이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국내 자금의 매수를 부추겼다.
2009년 초 외국인들은 미국의 양적완화 효과를 예상, 다시 한국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지만 리먼 사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국내 자금은 2009년부터 되레 주식을 내다판다. 2010년 5월 미국의 2차 양적완화가 나올 당시에도 외국인은 이 같은 정책을 예상해 매수로 대응했지만, 국내 자금은 매도를 늘린다.
2007년부터 외국인들의 코스피 비중은 크게 줄었지만, 영향력까지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비중이 아니라 실력이었다.
2007년 1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외국인은 628억달러를 순매도했고, 시가총액은 7611억달러에서 4264억달러로 44%, 3347억달러가 증발했다. 2009년 4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외국인은 353억달러를 순매수했는데, 이 기간 시가총액은 4264억달러에서 9902억달러로 5638억달러가 불어난다. 순매도 금액의 5.3배를 하락시키고, 순매수금액의 16배를 불린 실력이다. 외국인 매도물량을 비싸게 받아주고, 외국인에게 싼값에 매수물량을 제공해준 국내 자금 덕분이 크다.
외국인 입장에서 세상에 이런 현금인출기가 없다. 증시 유동성은 좋고, 외환보유액도 충분한 데다 손쉽게 ‘먹잇감(?)’이 되어주는 국내 자금까지 있다 보니 돈 빼가기엔 안성맞춤이다. 외국인 입장에서 본국에 문제가 생겨 돈이 필요해지면 해외에 투자해 놓은 자산을 파는 게 당연한데, 그 조건에서 한국이 최고다.
따라서 외국인에게 애국심을 기대하는 ‘나쁜 외국인론’을 펼치기보다는 국내 투자자금의 투자역량을 높이는 게 먼저라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M자산운용사 대표는 “외국인은 낮은 금리와 글로벌 정보력 등 여러 조건에서 국내 투자자 대비 나은 입장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규제에 있어 좀 더 자유롭다는 점이다. 국내 투자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제를 낮춤으로써 투자역량을 높이면 국내 장기투자 자금의 유입을 촉신시켜 외국인으로 인한 증시 변동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익명의 H운용사 채권운용본부장은 “외부 충격에 민감한 수출 중심의 증시 구조에서 외국인들이 그들의 사정에 따라 주식을 대량으로 사고파는 것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수출 중심, 대기업 중심 경제정책을 수정해 내수와 소득계층 간의 균형 있는 경제성장을 이뤄낸다면 외부 충격에 따른 증시 변동성도 줄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길용 기자/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