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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동원-장효조, 그들은 23년전에 죽었다
2011년 9월.

우리는, 한국야구는 너무 쉽게 그들을 잃었다. 80년대를 풍미한 ‘강철어깨’ 최동원과 ‘영원한 3할타자’ 장효조다. 불과 10년 남짓한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대기록과 위대한 플레이를 남겨놓았다. 103승을 거둔 최동원은 무려 80경기를 완투했고, 장효조는 통산타율 3할3푼1리라는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한국야구사에서 최동원과 장효조라는 거목은 승수와 타율이라는 단순한 잣대로 가늠할 수 없다. 최동원보다 나은 투수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승환보다 묵직한 직구와 활처럼 휘는 커브, 화려한 키킹을 앞세운 역동적인 피팅으로 타자들을 KO시킨 투수는 최동원 외에 없었다. 장효조보다 홈런을 많이 친 이승엽도 있었고,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양준혁도 있었지만 어떤 공도 쳐낼 것 같은 스윙과 임팩트 능력을 갖춘 선수는 장효조 외에 없었다.

그들이 이땅에 머문 시간은 불과 50년 남짓했지만, 그들이 남긴 발자욱과 그림자는 너무나 깊고도 짙다.



1982년 9월.

막 프로야구가 태동한 그해 서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선희 황규봉 이길환 등 쟁쟁한 선수들이 프로로 진출해버린 한국은 최동원 선동렬 장효조 김재박 한대화 등을 내세웠다. 장효조는 이 대회 때문에 프로야구 진출을 미뤄야 했다. 결국 결승에서 한대화의 결승 3점홈런으로 한국은 우승을 차지했다. 아마시절 최동원과 장효조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 영광을 함께한 순간이다.



1973년.

장효조는 대구상고-한양대를 거쳐 포항제철과 경리단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영원한 3할타자’인 장효조는 고교와 대학 및 실업시절에는 당연히(?) ‘4할타자’에 타격상 수상을 밥먹듯 했다. 고교 2학년 때인 73년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타격왕이었고, 74년 대통령기에서도 5할을 쳐 타격상을 받았다. 실업 때는 7할을 친 적도 있다. 투수들에게 장효조는 피해가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1975년.

최동원은 경남고-연세대를 거쳐 아마 롯데에서 뛰었다.

최동원은 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17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고, 76년 청룡기에서는 1경기 20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연세대 시절이던 78년에는 대통령기 준결승에서 동아대를 상대로 연장 14회까지 0-0 무승부를 기록한 뒤 이튿날 이어진 경기에서 18회까지 완투해 1-0 승리를 거뒀다. 게다가 불과 몇 시간 뒤 이어진 성균관대와의 결승에서 다시 마운드에 올라 9이닝을 완투하며 3-2 승리를 거뒀다. 이틀간 27이닝 동안 375개의 투구를 했다. 그의 강철어깨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84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등판해 혼자 4승을 따내고, 87년 해태 선동렬과의 15회 완투대결 무승부를 기록했다.



1988년.

‘영원한 부산사나이’일 것 같았던 최동원은 88년 선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선수협의회 결성을 시도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롯데는 시즌 후 삼성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만약 계속 롯데에서 뛰었다면 최동원이 어떤 기록을 세웠을지 모르지만 이후 의욕을 잃은 최동원은 90년을 끝으로 마운드를 떠나고 말았다. 그때 이미 한국야구 최고의 투수 최동원은 죽었다.

그에 앞서 88년 1월 삼성은 전년도 MVP였던 장효조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장효조가 부동의 3할타자지만 큰 경기에 약하다는 것이 삼성이 밝힌 이유. 그러나 매년 구단의 연봉제시액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던 장효조가 눈에 거슬렸던 삼성은, MVP를 수상했는데 500만원을 인상하는 데 그쳤고, 장효조가 반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장효조는 88년 삼성에서 뛰었지만, 결국 이듬해 김용철과 2대2 트레이드되며 대구를 떠나 롯데유니폼을 입는다. 대구가 낳은 불세출의 강타자 장효조의 방망이도 이때 꺾였다.



그리고 그 후.

이제 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구단들은 명예감독이나 영구결번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담는다. 하지만 그들 인생의 전부였던 야구를 빼앗아갔던 것은 그들이었다. 그것이 결국 최동원 장효조의 마음속에 치유할 수 없는 병을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세포는 그들의 몸을 갉아먹었지만, 이미 그들은 23년 전 생겨난 마음의 암세포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 날개가 꺾인 천재들은 다시 날갯짓을 할 수 없었다.

오가와 요코가 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주인공 박사는 교통사고로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80분마다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도 영원히 잊히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한신 타이거스의 명투수 에나쓰 유타카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도, 한국 야구팬들도 박사처럼 최동원의 역투와, 장효조의 호타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은 한국야구의 천재 2명을 데려갔지만, 대신 사라지지 않을 전설을 남겨주었다.



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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