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최종태(79)의 작품이다. 1959년 등단한 이래 50년간 인물조각을 고집해온 노(老) 작가가 ‘구원(久遠)의 모상(母像)’이란 타이틀로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연다. 4년 만에 갖는 전시에 최종태는 근래들어 본격적으로 작업한 채색 목조각을 내놓았다. 또 브론즈및 석조 등 40여점의 조각과 수채화까지 총 60여점을 출품했다. 정신성이 담긴 ‘숙명의 형태’를 추구하며 외길을 걸어온 작가의 작품은 ‘아름다움의 끝에는 성스러움이 있음’을 말없이 드러낸다
-오방색을 입힌 채색 목조각들이 새롭다.
“어렸을 때 그렸던 수채화를 다시 시작했는데 그 색조가 목조각으로 스며들어갔다. 우리 전통민화 속 원색들이다. 처음엔 나무의 흠을 감추려 칠했고, 요즘은 본격적으로 채색조각을 하고 있다. 나무에 그림을 그리는 거지. 민화나 단청 속 조선의 정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어서 말야"
-‘작가 최종태’ 하면 파스텔화인데 수채화가 많다.
“요즘들어 수채화에 끌린다. 그림이 자꾸 밝아지고 있다. 어린 시절 대전에 살며 보았던 강 건너 풍경이 내 그림이 됐다. 야트막한 산등성은 조각이 되고. 어릴 때 바탕에 있던 걸 완성해가는 게 사람의 일생인 모양이다”
-조각상이 죄다 여성이다. 왜 여성만?
“50년째 받는 질문이다. 예수상, 그 아버지 요셉상 만든 것 빼곤 모두 여성이다. 여성을 만드는 건 의도하고 한 건 아니다. 특별히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살아오며 관찰한 거지. 프랑스에 작품을 가져갔더니 역시 ‘모델이 누구냐?’고 묻더라. 그래서 그냥 한국사람, 한국여성이라 했지"
-기도하는 듯한 여인상을 보면 슬며시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1980년대 초 인사동에서 파스텔 전람회를 가졌는데 철학과 미학을 가르치시던 대학 은사가 방명록에 ‘여성적인 것. 영원한 것’이라는 글을 남기셨다. 30년 전인데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며칠 전 라디오를 듣다가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했음을 알게 됐지. 여성적이란 것엔 ‘수용’ ‘배려’가 담겨 있어. ‘사랑’과도 일맥상통하고. 여성적인 것은 폭력이 아니야.
-50년간 인물조각만 했는데 지겹지 않나
“일이 너무 재미있는 걸? 깊이 파고들 수록 더 그래. 피카소도 ‘나는 붓을 집어드는 건 쉬운데 놓는 게 어렵다’고 했잖아. 나도 비슷해. 새벽 5시면 어제 작업했던 게 너무 궁금해서 지하작업실로 불을 켜고 내려가지. 손자 보고 싶어 설레는 거랑 비슷한 거야"
-나무는 어떤 걸 쓰나
"좋은 나무를 만나야 하는데 이게 어렵다. 요즘 우리 나무는 거의 없어. 고가(古家)를 헐어서 나오는 나무도 드물고. 건축자재로 쓰는 나무를 쓰는데 두께가 얇아. 나무 중엔 은행나무가 좋지. 건조도 잘 되고, 색도 좋아. 이번에 2점은 그래서 채색도 안했어"
-젊은 시절, 제대로 작품활동을 하려면 이론적 토대를 갖춰야 한다며 독학으로 동서양 미술사를 공부했다던데.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선생이 날 부르시더니 "최종태, 너 글 잘 썼다. 근데 네 글이 아니다"라는 거야. 대학 졸업하고, 내 작품을 해야 하는데, "네 글을 쓰라"는 그 말이 생각 나지 뭐야. 조선의 역사와 미술을 독학으로 공부했지. 그 땐 서양 것만 배웠거든. 한국의 맥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하고 동서고금을 다 찾아다녔는데 결국 이 ‘안’(가슴)에 있더라고. ‘봄을 찾아 온 들판을 돌아다녔는데, 봄이 없어 실망해 집에 돌아왔더니 울타리에 봄이 와있네’란 시도 있잖아? 요즘 내가 그래. 엊그제 그 세계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았지. 그그저께 죽었다면 몰랐을 거야. 아쉬울 뻔 했지. 이젠 정리가 됐어. 카잘스도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라" 했잖아. 추사가 제주로 유배 가서 한 얘기.“入於外法 出於無法 我形我法” 나는 내 법으로 그리고 있다는 말. 세계미술사를 죽어라 헤맸는데 바로 이 거였어. 피카소, 마티스도 못한 거지. 단 석줄로 추사가 정리한 거야. 대단하지"”
-은사가 참 짱짱하셨다.
“내가 스승 복(福)이 좀 있어. 195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해 김종영, 장욱진 선생을 만났어. 그런데 두분이 엄청 까다로왔어. 그들 옆에 가려면 깔끔해야 했지. 외모가 아니라 ‘마음’이 말야. 장욱진 선생은 보통 땐 말이 없다가도 술 한잔만 들어갔다 하면 직사포야. 내 약점을 막 지적했지"
-스승인 김종영의 ’불각’이란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깎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있을 것만 있다는 이야기지. 동양미술은 단순하게 함축돼 있어. 서양미술은 표현이 너무 많은데 말(표현)이 안 보여야 내면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거든. 많은 얘기를 하려면 단순해야 해"
-젊은 시절, 세계 미술계는 추상 붐이었고, 한국에서도 추상조각이 유행했다. 그 흐름과 거리를 뒀는데
“식민지인 줄도 몰랐는데 해방이 왔고, 전쟁을 겪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나를 지배했어. 그러다 1965년 국립박물관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본 거지. 여인상에 본격 매진한 것도 그 때부터였어. 그 전엔 인물을 해놓으면 자꾸 슬픈 얼굴이 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어려운 시대였잖아. 이후론 그 그늘을 벗기느라 애를 썼지. 이젠 슬픈 얼굴이 거의 없어졌어. 1㎜오차로 더러 웃게도 하고, 안 웃게도 할 수 있게 됐지”
-천주교 신자신데 법정 스님과도 교유하셨다
"인천 소래 성바오로수녀원 피정의 집, 대치2동 성당 등 성당 조각을 많이 했어. 근데 길상사 관음상도 했어. 종교간 화합의 상징이라고들 해. 내게 종교와 예술은 하나야. 한 덩어리지. 요즘 종교는 서로 많이 다투는데 안 다퉈야 해. 석가모니는 모두가 하나라고 했어. 예수도 원수를 사랑하라 했잖아?"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영원성, 무한함을 떠올리는 작가는 구도하는 마음으로 그 ‘궁극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다. 전시장에 나온 작품들은 형태와 의미, 인간과 자연, 종교와 예술의 이분법적 경계를 뛰어넘으며 오늘 우리 앞에 근원적 생명과 순수를 만나게 한다. 서울전시(11월13일까지) 이후에는 대구 대백프라자와 수성아트피아에서 계속된다. 02)720-1020.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