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50일.”
10ㆍ26 재보궐선거를 향한 길고 긴 레이스도 어느덧 종착역에 다다랐다. 지난 50여일은 훗날 한국 정치사의 터닝 포인트로 기록될 만큼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정치 영웅이 몰락했고 새로운 스타가 등장하기도 했다. 후보를 24시간 밀착마크했던 취재기자들이 숨 가빴던 50일의 여정을 뒤돌아봤다.
▶ 8월 24일 무상급식 주민투표, 투표율 25.7%...오세훈의 몰락
모든 사건의 발단은 8ㆍ24 무상급식 주민투표였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판이 커질 줄은 아무도 예상 못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주민투표를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오 전 시장은 여소야대의 서울시의회와 우면산 산사태 책임론 등 여론 악화로 인해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고 그 타개책으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선택했다. 그는 스스로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까지 나와 투표를 독려했고 야권은 투표거부운동으로 맞섰다. 결과는 패배였다. 25.7%의 투표율에 그쳐 투표함 개봉 요건인 33.%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오 전 시장은 투표 직후 “참으로 안타깝다”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회견장을 떠났다. 결국 투표가 있은 지 이틀 뒤인 26일 오 전 시장은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 사퇴를 발표했다. 참신한 보수 이미지로 승승장구하던 ‘스타 정치인’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서울시장이 공석이 되면서 미니 선거인 줄 알았던 10ㆍ26 선거가 순식간에 메가톤급 선거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투표율 25.7%를 두고 홍 대표가 “사실상 승리”라고 했던 발언이 누리꾼들에게 ‘사실상 시리즈’로 패러디 돼 화제를 모았다.
▶ 9월 6일 안철수-박원순 단일화 성공, 안풍(安風)이 불다
공석이 된 서울시장을 놓고 관심주자들의 숨고르기가 시작됐다. 1일 안철수 서울대융합기술대학원장은 “시장은 바꿀 수 있는 것이 많다”며 보궐선거 출마를 고민하고 있음을 밝혔다. 같은 날 천안에서 의원 연찬회에 참석하고 있던 홍준표 대표는 안 원장의 출마설에 “다자간의 대결이 되면 좋다”말하며 크게 개의치 않은 모습이엇다. 그러나 서울에서 실감한 안풍은 거셌다. 대중들은 안철수에 열광했다. 안 원장의 인기는 단숨에 서울시장을 넘어 차기 대권 판세를 이미 평정하고 있던 박근혜 전 대표의 자리까지 위협했다. 각종 여론조사 지표도 요동쳤다.
같은 시기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출마 의지를 밝혔다. 2인의 정치신인의 등장은 곧 여야 대결구도로 형성돼온 선거판을 ’기성정치 대 비(非)정치세력’의 구도로 이끌었다. 기성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과 실망의 표출이었다.
민주당도 안 원장의 무소속 출마 가능성에 긴장했다. 진보 성향으로 민주당과 지지층이 상당 부분 겹치는 안 원장의 부상은 민주당에게 더욱 위협적이었다. 한나라당도 안 원장을 이길 수 있는 대항마 마련에 바빠졌다.
6일 안 원장은 돌연 출마 카드를 포기하고 5%의 지지율에 머물러 있던 박 상임이사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당시 안 원장은 50%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며 사실상 초 우세인 판세를 굳혀가는 상황이었다. 안 원장은 이날 박 상임이사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박 상임이사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혔다. “서울시장직을 누구보다 잘 수행할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지지이유였다.
▶ 10월 7일 우여곡절 끝에 나경원-박원순 양자 대결로 굳어지다
시민사회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힌 기성 정당들은 흔들렸다. 출마를 고심하던 나경원 당시 최고위원에게 시작도 하기 전부터 가시밭길에 부딪혔다. 보수시민단체는 이석연 전 법제처장을 추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군은 예상보다 빠르게 좁혀졌다. 나 최고위원은 대중적 인지도를 강점으로 애초부터 여당 내에서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다. 그럼에도 나 최고위원은 시종일관 침묵했다. 동시에 당에서는 ‘나경원 비토론’이 떠올랐다. 홍 대표는 8월 30일 “오세훈 아류는 안된다”, “탤런트 정치인은 안된다”며 이 같은 비토설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안풍에 대항할 카드 찾기는 만만찮았다. 그 사이 나 최고위원은 당의 비토론을 무릎쓰고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민주당은 경선 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다. 주민투표 바로 다음날인 25일에는 일찌감치 천정배 민주당 최고위원이 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신계륜 의원, 박 의원, 추미애 의원이 당내 경선 주자로 부상했다. 문제는 박 후보였다. 민주당의 입당제안도 결국 거절했다. 결국 박 후보를 제외하고 치뤄진 민주당 경선은 박 의원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어진 야권통합경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박 후보가 박 의원을 누르고 단일후보로 우뚝 서게 됐다. 시민사회의 도전이 마지막 라운드까지 이어진 것이다. 반면에 민주당은 손학규 대표가 사퇴를 두고 해프닝을 벌이는 등 당내외에서 ‘불임정당’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결국 패배를 승복하고 기존의 약속대로 박 후보를 전면적으로 돕기로 당론을 정했다.
▶ 10월 26일 결전의 순간까지 피 말리는 선거전, 여야의 명운이 걸려
후보 등록이 끝나고 13일부터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여야 세력간 본격적인 레이스가 펼쳐졌다. 이번 선거는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정치인 대 시민사회세력 사이의 맞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게다가 2006년 오세훈-강금실 전 법무장관, 2010년 오세훈-한명숙 전 총리에 이은 세번째 성(性)대결이기도 하다. 선거전 초기는 단일화 효과를 등에 업은 박 후보의 우세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나라당 측에서 후보 검증에 열을 올리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기 때문이다. 박 후보의 학력ㆍ병역ㆍ재산 등이 여론의 도마위에 올랐다. 게다가 전면에 나서지 않던 박 전 대표가 초반부터 가세했다. 그 결과 10%까지 차이 나던 여론조사도 어느덧 초박빙이라고 불릴 만큼 엇비슷해졌다.
판세가 불리해지자 박 후보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민주당 등 야5당의 힘을 얻어 나 후보 측과의 공방전에 나섰다. 때마침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나는 꼼수다’를 비롯해 나 후보를 향한 반격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고가의 피부숍 출입과 2캐럿 다이아몬드 재산 축소 등의 논란이 번지기도 했다. 두 사람은 6번의 양자 토론을 거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날선 공방도 벌였다. 나 후보가 박 후보에게 ‘끝장토론’을 제안하자 박 후보는 “나 후보는 말에 자신 있는 모양”으로 되받아치며 감정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누구도 승기를 잡지 못하자 결국 박 후보는 ‘안철수’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24일 안 원장은 칩거에서 벗어나 희망캠프를 전격 방문해 준비해 온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나 후보도 박 전 대표로부터 그간 선거운동을 하며 일일이 기록해 온 ‘수첩’을 받았다. 두 후보 모두 시민 한 사람을 더 만나기 위해 불철주야로 뛰어다녔지만 선거 막바지로 갈수록 서로를 향한 난타전이 계속됐다. 서로에 대한 앙금도 깊어졌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그 후유증은 오래도록 남을 공산이 크다.
양대근ㆍ손미정 기자/bigroot@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