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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의 아름다운 毒 ‘가비’
조선 최초의 커피 애호가 고종을 둘러싼 음모…역사와 허구 사이 열려진 상상의 공간
기록되고 알려진 사실(史實)로부터 출발하자. 한국인이 커피에 대해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1895년 출간한 유길준의 ‘서유견문’으로 꼽힌다. 미국 유학을 했던 유길준은 조선인이 숭늉을 마시듯 서양인들은 커피를 마셨다고 전한다. 아울러 1890년을 전후해 커피가 중국을 거쳐 국내에 전래됐다는 얘기도 있다. 1888년 개항지 인천에는 일본에 의해 국내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커피가 판매됐을 것이라는 게 역사가들의 가설이다. 몇 가지 사실을 근거로 하면 늦어도 1880~1890년 사이에 일부 조선 사람은 커피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즐겨 마셨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공식적으로 조선 최초의 ‘커피 마니아’는 바로 고종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시기에 처음 커피를 접하게 됐다.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마시며 애호가가 된 고종은 덕수궁에 돌아온 뒤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정관헌을 지어 다과와 함께 커피를 즐겼다.

고종은 자신이 즐겼던 커피 때문에 독살될 뻔 하기도 했다는 소문도 문헌에 남았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통역관으로 세도를 누리던 김홍륙이 고종의 환궁 후 친러파의 몰락과 함께 관직에서 쫓겨나자 앙심을 품고 커피에 독을 타 왕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영화 ‘가비’는 조선 최초의 ‘커피 애호가’로 알려진 고종을 역사와 허구 사이에 열려진 상상력의 공간으로 호출한 영화다. 사료에 남은 몇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가상의 인물을 더하고 허구의 상상력을 보탠 소설이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이며, 이를 영화화한 작품이 ‘가비’다. 제목인 가비는 커피를 음차한 한자어로 가배라고도 하며 커피 전래 초창기 한국에선 서양의 탕국이라는 뜻으로 양탕국이라고도 불렸다.

일리치(주진모 분)와 따냐(김소연)라는 가상의 남녀가 고종(박희순)과 함께 주인공이다. 따냐는 조선과 러시아를 오가며 활동했던 역관의 딸로, 어린 시절 비운에 아버지를 잃게 된다. 따냐에겐 부친이 역적으로 누명을 쓰고 조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한이 가슴에 새겨진다. 일리치는 따냐의 아버지에게 약탕기에 커피를 끊여 바치곤 했던 심부름꾼 소년으로, “내 딸을 지켜달라”는 주인의 유언을 듣고 따냐에게 평생 사랑을 맹세한 남자다.

러시아를 떠돌며 사기와 절도, 강도 등으로 살아가던 일리치와 따냐에게 어느날 일본을 등에 업은 조선계 일본 여성 사다코(유선)의 마수가 뻗친다. 일본과 사다코의 사주로 따냐와 일리치는 조선으로 오게 되고, 바리스타로 위장한 따냐는 고종의 곁에서 커피를 내리는 임무를 받게 된다. 일본군 장교복을 입게 된 일리치는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간 따냐를 비밀 첩보원으로 이용하며 일본의 대러 정보활동과 대조선 침략의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따냐는 러시아와 일본의 이중첩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따냐는 왕의 곁에서 커피를 내려주며 점차 고종의 고독과 신념, 인간적인 풍모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 가운데 고종은 ‘제국의 야심’을 드러내고, 따냐는 조선 왕을 시해할 ‘독배’에 커피를 내려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접속’ ‘텔미섬딩’ ‘황진이’의 장윤현 감독은 따냐의 멜로드라마 속에 고종에 대한 인간적 연민과 왕의 애국ㆍ애민주의적 풍모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관객의 테이블에 올렸다. 하지만 기대할 법한 에로티시즘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부족한 편이다. 그래도 관람 뒤엔 핸드 드립 커피 한잔 간절하게 하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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