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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니까 ‘첫사랑’이다
서툴렀던 젊은 날의 사랑 담은‘건축학개론’…벽돌처럼 쌓여있던 추억과 너무 커버린 내가 만났을 때
1990년대식 첫사랑은 늘 짝사랑이었다. 아침에 들은 노래가 종일 입에서 맴돌듯, 가슴앓이하던 그 시절의 풍경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그 시절의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광식이 동생 광태’에선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이었다. 이제 또 하나의 노래가 90년대식 첫사랑의 OST로 추가됐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다. 94년 5월 발매한 바로 그 앨범 속 촉촉하게 젖은 김동률의 발라드. 영화 속 주인공 승민(대학생 시절 이제훈, 현재 엄태웅 분)과 서연(수지, 한가인 분)은 아마도 94학번일 테고, 극 중 건축과와 음악대 신입생으로 1학기 첫 수업 ‘건축학개론’에서 만났다.

노래처럼 많은 날이 지났다. 영화 속 지금이 바로 오늘이라고 짐작한다면 ‘건축학개론’에서 승민과 서연이 다시 만난 건 18년 후다. 건축설계사가 돼 오늘도 사무실 한쪽에서 밤샘작업을 하다 새우잠을 자고 부스스한 얼굴로 투덜대고 있는 승민 앞으로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 한 명 찾아온다. 서연이다. 18년 후 그녀의 첫 마디.

“오랜만이네. 동문 주소록 되게 정확하다.”

“근데, 누구신지….”


첫사랑의 재회 순간은 누구에게나 이렇듯 오랜만에 다시 탄 자전거처럼 어색하고 민망하며 부질없어 보이는 것일까. 하지만 다시 탄 자전거 안장은 불편해도 바퀴는 잘 굴러가게 마련이다. “집은?”, “개포동”, “결혼은?”, “했어”, “남편은 뭐하는데?”, “의사”. 질투. 이제 다 지난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짧은 순간에 익숙한 친구처럼 불려온다. “왜 왔어?”, “제주도에 집 지어 달라고”, “남편이 돈을 잘 버나 봐”. 비아냥으로 드러나는 질투.

결국 승민은 서연의 집을 짓기로 한다. 그리고 새 집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올릴 때마다 18년 전 ‘건축학개론’ 수업을 들었던 6개월간의 찬란하고 아팠던 첫사랑의 추억을 하나씩 불러온다. 그런데 왠지 현재 서연의 ‘슬픈 눈빛이 승민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녀는 무슨 상처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5월의 햇살처럼 푸르렀지만 모든 것이 서투르고 아프기만 했던 시절, 그녀에겐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스무 살 무렵 한강의 어느 끝자락 나들이길에서 막걸리를 나누었던 두 남녀가 너무 오랜 날이 지난 후 제주도의 푸른 밤에 빠져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인다. 서연은 결국 무너져 승민의 마음속으로 쓰러져가고 못다 한 말과 기억들이 다시 찾아온다. 하지만 젊은 시절 꿈꾸었던 미래의 사진들, 그리고 현실이 된 오늘, 여기. 추억만으로 마주하기엔 승민과 서연이 너무 커버렸다. 승민의 곁엔 이미 다른 여인이 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기억의 습작’을 들으며 관객들은 생각한다. “오래전 그 혹은 그녀에게도 잊혀져 가는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이 영화의 미덕은 서울 정릉과 한옥, 제주도 등 제목에 걸맞은 풍경과 지리학, 집의 건축 과정을 연애의 ‘기승전결과 그 후의 해후’와 살포시 겹쳐놓은 데 있다. 특히 대학생을 연기한 이제훈과 수지의 연기가 놀랄 만하고, 빛바랜 사진 속 젊음을 빛나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에 반해 현재의 승민과 서연 역의 엄태웅과 한가인의 연기는 평이한 편이다. ‘불신지옥’으로 장편 데뷔한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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