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스무살 서태지의 꿈, 혁명ㆍ진화ㆍ그리고 전설이 되다
1992년 3월 가요계에는 전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지금까지 이런 음악은 없었다. 발라드 일색이던 가요계에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이 멜로디를 만들어낸 요상한 랩송이 등장했다. 안정을 추구하는 기성 음악인들은 그들의 등장에 ‘저것도 노래냐’는 반응으로 냉소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서태지(20)ㆍ양현석(22)ㆍ이주노(25)) 은 방송 한 번에 한국대중음악계의 지형을 뒤바꿔버렸다.

지난 92년 3월 23일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들의 첫 앨범을 출산했다.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음악이 세상에 나온 날, 이날은 일대 사건으로 기록된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을 향한 관심이 앨범 발매와 더불어 폭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딱 한 번의 방송출연이 계기가 됐다.

92년 4월 11일 서태지는 MBC ‘특종TV연예’의 신인 발굴 무대에 올랐다. 달랑달랑 상표를 노출시킨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멜빵 한쪽씩을 늘어뜨린 세 청년은 ‘난 알아요’라는 랩송을 부리기 시작했다. 힙합비트에 기반을 둔, 하지만 시나위 출신 서태지의 로커 감성이 깃들여 자유로운 베이스 사운드가 시원하게 타고 흐르는 곡이었다.

‘난 알아요’를 부른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날 전문가 평가에서 10점 만점에 고작 7.8점의 점수를 받았지만 대중의 평가는 달랐다. 이날 이후 서태지는 문화혁명의 아이콘이 되기에 이른다. 거리에서 가장 많이 들려오는 음악은 당연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것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캐롤보다도 서태지의 음악이 더 많이 울려퍼진 때로 기억된다.



단지 한 시기가 아니었다. 얼마간의 휴지기를 거쳐 들고 나오는 앨범마다 파격이었다. 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와 ‘획기적이고 참신하다’는 극적인 평가를 달고다닌 서태지의 음악들은 이 평가들 그대로였다. 새로웠으며 파격적이었고, 그렇다고 이질적이지 않았다. 세대공감이 주를 이루는 가사로 서태지 키즈를 위로해왔기 때문이다.

태평소가 울려퍼지는 ‘하여가(2집ㆍ1993년 6월)’는 국악이 가미됐어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추구했던 ‘팝댄스’의 세련미를 놓지 않았다. 거기에 격렬하게 울려퍼지는 일렉트릭 기타 솔로의 향연은 기존의 가요는 결코 떠올리지 못했던 시도였다. ‘하여가’의 존재감이 막강했던 2집에는 특히 발라드 ‘너에게’가 서태지 팬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일찌감치 테크노에 손을 댄 ‘수시아’의 뛰어난 음악성이 돋보인다. 거기에 늘 콘서트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우리들만의 추억’도 빼놓을 수없다. 겨우 2집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들을 향한 헌가다.

네모난 교실 속의 울부짖음이 담긴 ‘교실이데아’가 속한 3집(1994년 8월)은 대중적으로 친숙한 음악에서 조금 더 벗어나 얼터너티브 록과 강한 비트의 헤비메탈을 추구했다. ‘발해를 꿈꾸며’를 통해 통일문제를 다루고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통해 마약문제를 건드린 것은 서태지의 음악세계가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곧 서태지가 어떻게 문화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95년 10월 발매된 4집 앨범은 또 달라진 서태지와 아이들을 증명했다. 이제 서태지는 시대의 벽을 깨는 문화 아이콘이었다. ‘컴백홈(Come Back Home)’을 들고 온 서태지의 4집앨범은 발매 1주일 만에 1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팰범이었다. 서태지는 이 앨범에서 갱스터 랩을 시도했다. 소위 알앤비보다 느린 음악 장르를 통해 서태지는 보다 반항적인 메시지를 담아냈다. 사회의 질서에 대한 반항이고 무질서에 대한 일침이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져내리던 날 가사를 쓴 ‘시대유감’이 그랬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리고 ‘컴백홈’을 통해 보다 느슨하고 중량감있는 몸짓을 선보이며 더 큰 자유로움을 갈망했고, 당시 세 사람이 입고 나온 스노보드(snoeboard) 룩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거리를 뒤덮었다. 그들은 내내 현상으로 존재한 것이다.

등장할 때마다 문화현상을 만들어낸 이들 세사람은 1992년부터 96년까지 단 네 장의 앨범(총 750여만장 판매)으로 대한민국 가요계의 산 역사가 된다. 시종일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갈망했던 시대의 아이콘, 서태지가 말하는 꿈은 음악이라는 현실로 재현됐으며 서태지의 손을 거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다. 가요사에서는 서태지의 혁신과 영향력을 대체할 가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고 단언한다. 때문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들은 팬들에게는 영원한 ‘문화대통령’이며 서태지의 음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설이 된 서태지의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상 그는 여전히 시대의 현상이다. 어디선가 움틀 포스트 서태지에게도.

<고승희 기자@seungheez> sh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