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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도의 남자'를 보는 즐거움과 불편함
[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KBS 수목극 ‘적도의 남자’는 인간의 사랑과 우정ㆍ욕망ㆍ미움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요즘 선우(엄태웅 분)는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경필의 죽음에 얽힌 인물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있다. 선우의 아버지는 15년 전 진노식 회장(김영철 분)과 직원 이용배(이원종 분)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자살로 처리됐다. 가난한 이용배는 그 대가로 아들 장일(이준혁 분)이 검사가 될 때까지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선우는 아버지의 죽은 이유를 캐기 위해 진정서를 접수하러 가다 용배의 아들이자 자신의 절친인 장일에게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아 벼랑으로 떨어진 후 실명하고 극적인 치료로 시력을 회복한 상태다.

선우의 복수는 치밀하고 냉정하다. 여전히 사건의 실체를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장일과 진 회장을 조금씩 옥죄어 나간다. 가해자는 죽을 맛일 것이다. 선우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짐짓 모른 척하면서 상대방을 차츰차츰 압박하며 몰아가는가 하면, 때로는 미친 듯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섬뜩한 비수를 드러내기도 한다.

지난 10일, 16부에서 선우는 검사 장일을 TV 법률 자문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장일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가 내리친 둔기에 뒤통수를 맞아 죽을 뻔했다. 고의성이 다분한데 살인 미수가 맞느냐?”고 묻는다. 당황한 장일은 ‘살인 미수’라고 말하고, 선우는 그 살인 미수자의 이름을 밝히겠다면서 이름 일부만을 말하고 전화를 끊어 긴장감을 극대화시켰다.

이런 방식은 이 드라마의 김인영 작가가 전작 ‘태양의 여자’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다. 사월(이하나 분)이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렸던 언니인 도영(김지수 분)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도영이 보게 한다든가, 또 그 연극의 대히트로 아나운서인 도영이 진행하는 생방송 토크쇼에 게스트로 초대돼 도영에게 언니 역할을 맡겨 대본에도 없는 대사로 도영을 공격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압권이었다. 사월이 도영에게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은 표정도 밝고 여유로운 법인데 언니의 표정은 늘 춥고 초조해. 꼭 파양 당할까 봐 두려움에 떠는 아이처럼”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파양 당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입양된 집안의 친딸 사월을 버렸던 도영이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불편하지만 이를 직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적도의 남자’도 엄태웅이 어떻게 복수하는지를 보는 드라마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심리와 본성, 행동양식을 포착하는 것이다. 김인영 작가의 꽉 짜인 상황 전개와 인물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 덕에 ‘가해자는 선, 피해자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며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들이 벌이는 심리게임에 가슴을 졸이며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장일과 진 회장의 숨통을 조금씩 조여가는 선우는 악인도, 선인도 아니다. 죄를 짓고 태연한 체하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갈 장일의 지독히 외로운 모습을 보는 건 슬프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불안하고 외롭게 느껴져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장일이 선우의 뒤통수를 치는 현장을 목격한 박수의 딸 수미(임정은 분)는 극사실주의 화가가 돼 그 현장을 그림으로 그려 장일을 압박한다. 하지만 사랑과 집착이 강해 목격했던 진실을 번복하기도 한다.

욕망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고 이를 숨기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 인생을 살아야 하는 모습이나 한때 모든 걸 줄 수 있었던 친구에게 잔인한 복수를 해야 하는 모습에서 언뜻 인간의 심리와 본성이 읽힌다. 인간의 본심이 읽히는 섬뜩한 상황들이 순간순간 나타나 시청자를 긴장하게 한다. 이 드라마는 인간 심리와 본성을 잘 그려내 공감을 얻지 못했다면 출생의 비밀과 복수극이라는 진부한 통속극에 머물렀을 것이다.

선우가 진 회장에게 “회장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제가 빼앗겠습니다”고 말했다. 복선, 암시와 관련이 있을 듯한 이 말로 시청자는 또 다른 반전이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다. 혹시 선우가 다시 실명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아직 선우가 모르고 있지만 진 회장이 선우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은 이미 드러났다. 

길러 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낳아준 아버지를 응징해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에 맞닥뜨리고 있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편안하게 보기는 그른 것 같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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