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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의 상상력 사전> 궁은 권력이자 흔들리는 욕망의 아지트…
궁(宮)
형제간 권력 다툼·처첩간 씨앗싸움…生과 死의 팽팽한 갈림길
‘장희빈’ ‘연산군’ ‘왕의 남자’ 등 한국 사극영화의 주요 모티브
최근 개봉한 ‘후궁’도 파국으로 치닫는 왕의 이야기 담아


한자어인 ‘궁(宮)’은 기묘한 자다. 뜻과 쓰임새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한자로는 ‘움집’의 위를 덮어씌운 모양을 본떴다는데, 가장 기본적으로는 누군가가 거처하는 자리, 곧 집을 뜻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기거하는 가옥이 아니라 왕족이 사는 집에만 궁이라는 단어를 썼다. 왕궁, 궁궐에서의 ‘궁’이다.

별자리를 뜻할 때도 ‘궁’을 쓴다. 주로 서구 점성술에서 태양이 지나가는 12개의 별자리를 일러 ‘황도 12궁’이라 하는 식이다. 별자리나 우주의 운행을 개인의 길흉화복과 연관시키는 것은 방법론만 다를 뿐 동서가 다르지 않은데, 동양에서도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혼인할 남녀 ‘궁’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따졌다. 이것이 ‘궁합’이다. 궁에는 ‘짝’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주로 왕의 부인과 첩, 즉 왕의 짝을 가리켰다. 중궁이나 후궁이라고 할 때의 궁이다. 그렇다고 보면 짝이란 결국 서로의 몸과 마음, 공간에 마련하고 지어놓은 상대의 집 혹은 자리가 아닐까. ‘궁합’도 서로의 몸과 마음, 운명에 들어설 짝의 집이 터와 어울릴 만한지 아닌지를 가리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궁합은 곧잘 성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때 궁이라는 단어는 좁게는 생식기를 이른다. 왕과 비가 갖는 잠자리를 ‘합궁’이라고 한다. 또 다른 대표적인 용례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궁형’이라는 제도에서 볼 수 있다. 궁형은 옛 시대 극형의 하나로 남녀의 생식기를 없애 후손을 잇지 못하게 하는 벌이다. 아예 한 사람의 몸에서 짝이 들어설 집터를 없애는 벌이요, 씨 곧 후손이 자라날 자리를 들어내는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궁은 집 혹은 자리 곧 영역이며, 권력이고, 짝이기 때문에 문학예술사에서 고래(古來)로 비극이 상연되는 무대였다. 영역을 확보해 집을 짓고, 짝을 찾아 후손을 이으며, 그 안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다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궁’인 것이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왕후로 맞은 것도 궁에서였으며, 아버지의 독살을 복수하기 위해 나섰다가 뒤틀린 비극에 휘말린 햄릿 왕자도 덴마크의 궁에 있었다.

한국사에서 역시 궁중은 처음부터 비극을 잉태한 공간이었고, 궁중사극은 사실 역사의 외피를 입었을 뿐 부자, 고부, 형제, 처첩 등의 충돌과 갈등을 다룬 비극적인 가정 멜로드라마였다.

장희빈이나 단종, 광해, 연산, 사도세자는 궁의 비극을 상징하는 한국사 속의 문제적 인물들이었고, 한국영화가 자주 등장시켰던 소재와 주인공이었다. 정창화 감독(‘장희빈’)과 그 제자였던 임권택 감독(‘요화 장희빈’)은 일찌감치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었다. 신상옥 감독은 1960년대 초 ‘연산군’ ‘폭군연산’ 등 2편을 거푸 내놨고, 임권택 감독 역시 ‘연산일기’를 찍었다. ‘단종애사’라는 똑같은 제목의 작품도 서로 다른 감독(전창근, 이규웅)에 의해 2편이나 만들어졌다. 

김대승 감독의 ‘후궁:제왕의 첩’

최근 한국영화에선 정통 궁중사극이 ‘퓨전사극’에 밀려 한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다. 퓨전이라고 불리는 변종사극은 궁 안팎으로 무대를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깨뜨리며, 권력암투보다는 말랑말랑한 연애나 액션, 코미디에 더 심취한다. 반면 임권택 감독의 제자인 김대승 감독이 연출해 최근 개봉한 ‘후궁: 제왕의 첩’은 정통 궁중사극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주인공 성원대군은 상왕인 이복형을 죽음으로 내몰고 조카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과 형수를 향한 금지된 욕망에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햄릿이자 오이디푸스다. 대비는 오로지 아들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어미, 본능의 화신이다. ‘오셀로’의 이아고이자, 맥베스의 아내라고 할까. 화연은 옛 남자 권유를 향한 지고한 사랑과 상왕에 대한 책임감, 자신의 씨를 목숨 걸고 보호하려는 어미의 본능이 중첩된 여인이다. 여기에 자신을 ‘거세’시킨 세상을 향한 복수심과 운명의 여인 화연을 향한 순정 속에 갈등하는 권유가 가세해 거미줄같이 얽힌 어지러운 권력과 욕망의 그물을 완성한다.

‘후궁’이 뿌리를 대는 작품은 44년 전 세상에 나온 신상옥 감독의 걸출한 사극 ‘내시’다. 신성일, 윤정희, 박노식, 남궁원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가문의 야심을 위해 후궁으로 입궐한 여인과 그녀를 사랑했다는 죄로 거세돼 내시가 된 남자, 대비ㆍ외척들의 권력투쟁 속에서 환멸과 회의를 느끼며 왜곡된 성적 행각을 벌이며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왕의 이야기를 담았다.

‘내시’와 ‘후궁’은 ‘궁에서 비롯된 모든 비극’을 보여준다. 궁이 무대이며, 사랑을 버리고 후궁이 된 여인이 있으며, 궁형을 당해 내시가 된 남자가 있고, 어긋난 애정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는 ‘합궁’이 있다. 그리고 결국 남자의 권력은 허망하고 영원한 것은 어미의 본능이었으니, 이 모든 일이 모든 이가 태어나고 돌아가는 그곳, 태초이자 궁극의 집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들이 사는 어머니의 방, 자(子)의 궁(宮) 말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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