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이 도시가 좀 생소하지만 독일 베를린에서 차로 4시간반 거리의 포즈난은 유럽인들에겐 ‘중세의 웅장한 성채들이 늘어선 폴란드 최고(最古)의 도시’,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유럽의 동서를 잇는 고도 포즈난은 15~16세기 유럽교역의 최대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금속·기계·고무·식품·화학 산업이 강세다. 따라서 소득 또한 높은 편이다. 삼성전자의 대형 공장도 인근에 위치해 있다.
아름다운 중세 성당과 박물관, 미술관이 포진한 폴란드 서부의 중심지 포즈난의 신공항에 한국 작가의 대형 회화 작품이 설치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 이상남(Sang Nam Leeㆍ59)은 포즈난 신 공항에 가로 73m, 폭 3m의 초대형 벽화를 오는 9월 설치한다.
이상남은 당초 공항 벽화를 제작키로 했던 건 아니다. 그는 9월 14일부터 10월 14일까지 포즈난에서 열리는 국제미술제인 ‘제3회 미디에이션 비엔날레’ (2012 Mediations Biennale-Poznan)의 메인프로그램 섹션 작가로 선정돼 작품을 선보일 참이었다.
미디에이션 비엔날레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유럽-아시아-미주 대륙을 잇고, 다양한 예술장르간 융합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 2008년 첫 회가 열린 폴란드를 대표하는 현대미술제다. 지난 2회 비엔날레에는 재미작가 김수자(Kimsooja)가 참여한바 있다.
3회에 접어든 올해에는 4명의 큐레이터가 미주, 유럽, 아시아에서 100여명의 작가를 선정해 비엔날레를 펼친다. 요셉 보이스, 오노 요코, 그레고르 슈나이더,아니쉬 카푸어, 토니 아워슬러, 그리고 빌 비올라까지 쟁쟁한 작가들이 참여한다. 재미작가인 이상남은 미주 쪽 작가 큐레이팅을 맡았던 드니즈 카르발로에 의해 선정됐다.
이상남은 이번 비엔날레에 회화로 설치작업을 시도키로 하고, 올 초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큐레이터 및 건축가와 함께 시내 곳곳의 뮤지엄, 시청사를 둘러봤다. 그러던 중 포즈난 신공항의 너른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 이 곳이면 정말 좋겠다’는 느낌이 왔고, 그의 한국에서의 회화 프로젝트 자료를 살펴본 건축가 피요트르 바렐콥스키의 적극적인 추천과 함께 ‘신공항 벽면에의 회화 설치’프로젝트가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사실 포즈난 비엔날레측이 이상남 작품의 공항 설치를 제안하긴 했지만 공항을 디자인한 건축가가 오케이하지 않으면 무위에 그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그의 작품이 내걸릴 로비는 공항에서도 ‘얼굴’에 해당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건축가 바렐콥스키는 이상남의 작업을 마치 기다렸다는듯 흔쾌히 오케이해 이상남은 비엔날레조직위및 공항, 포즈난시의 지원을 받아가며 현재 벽화 마무리작업에 한창이다.
결국 이상남의 포즈난 미디에이션 비엔날레 출품작은 단순히 ‘비엔날레를 위한 1회성 작품 전시’에 그치지 않고, 포즈난 신공항 메인로비에 영구히 남게 됐다. 그의 작품은 신공항 출국장 로비를 가로지르며 길게 내걸린다.
폴란드의 유명 건축가로 포즈난 공항을 비롯해 도시의 랜드마크에 해당되는 건축물을 여럿 디자인한 피요트르 바렐콥스키는 “이상남의 사이보그하면서도 고전적인 회화는 포즈난 신공항과 더없이 잘 어울릴 것이다. 나 역시 기대가 크다”며 반겼다.
이상남은 공항을 이용하는 전세계인들이 자신의 벽화를 음미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고 했다. 동양의 한 작은 나라의 아티스트가 세계인들이 무수히 오가는 국제공항에 대형 회화를 설치하고, 작품을 통해 소통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재미작가 강익중이 미국 샌프란시코국제공항에 벽화를 영구 설치한 데 이어, 한국작가의 본격적인 작품이 국제공항 내부에 설치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이렇듯 세계적 요지에 작품이 설치되는 것은,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거나 기업 컬렉션이 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국제공항에서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에게 한국작가의 예술적 경쟁력을 입증해 보인다는 것은 엄청난 돈을 들여 한국 예술을 홍보하는 것 이상으로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상남은 “작가가 공공의 장소에 작품을 설치하는 것은 흔한 일이 돼 버렸지만 국제공항은 연간 수백만, 수천만명이 이용하는 다중시설이어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들어 K-팝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고, 신경숙의 소설도 뜨거운 반향을 얻고 있는데 미술로 ‘예술한류’에 일조하게 돼 기쁩니다”고 했다.
세계를 유목민처럼 누벼온 그가 요즘 주력하는 작업은 ‘회화 설치’다. 분명 그림이긴 하나 좁은 액자에 넣어두고 감상하는 게 아니라, 건물의 일부로 벽면 또는 통로 등에 회화를 설치하는 방식이다. 그는 사진이나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등에 밀려 날로 입지가 좁아드는 회화가 다시 살아나려면 대형 스케일의 ‘회화 설치’가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 2006년 서울 역삼동 LIG손해보험 본사 사옥에 설치한 대형 그림들이 큰 호평을 받는 바람에 이상남은 2010년에는 안산의 경기도미술관에 국내 최대 규모의 벽화(길이 46m, 폭 5.5m)를 설치했다. 또 작년에는 경남 사천의 LIG손해보험 연수원에 또다시 36m짜리 초대형 회화를 내걸었다. 특히 경기도미술관의 스펙터클한 회화는 건조했던 미술관에 큰 생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상남은 자신의 본격적인 ‘회화 설치’ 프로젝트가 이번 포즈난 공항으로 어느새 네번째를 맞고 있다며 앞으로 다섯번, 여섯번을 넘어서면 현대의 ‘회화 설치’ 분야에 나름대로 역사를 쓸 수 있지 않겠느냐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번 포즈난 신공항에 그는 자신의 대표적 연작 ‘풍경의 알고리듬(Landscapic Algorithm)’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번 신작(알루미늄 패널 위에 우레탄 아크릴물감)은 기존 작업에선 볼 수 없었던 태양을 연상케 하는 원형의 찬란한 기호 등 새 아이콘들이 다채롭게 배치돼 보다 다이내믹하고 산뜻해질 전망이다.
이상남의 그림은 컴퓨터로 작업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알루미늄 패널 또는 철제 패널, 캔버스 등에 손으로 무수히 덧칠해 완성한 작품이다. 공간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축적된 생각과 아이디어로 생성된 그의 긴장감 넘치는 기하학적 아이콘들은 ‘1㎜의 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정교하고 섬세하게 배치되고 표현된다. 단연 엄청난 공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작품 표면에 매끄러운 빛이 흐르게하고 싶어 재료와 마무리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편이고, 최소 50~100회씩 칠하며 갈아내길 반복합니다. 옻칠 회화도 마찬가지고요. 남들이 보면 도(道) 닦는다고 하죠.”
이상남은 “내 아이콘들은 직선과 원으로 이뤄집니다. 직선은 죽음이요, 원은 삶이고요. 나의 예술은 직선과 원이 무화(無化)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요. 그래서 실증과 합리를 추구하는 서구의 아티스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거죠”라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합리와 비합리,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샛길을 걷는 내 작업이 사람들의 영혼을 불러냈으면 좋겠습니다. 아, 포즈난 공항에까지 회화가 설치되니 이제 그 대상이 세계인으로 넓혀졌네요”라며 밝게 웃었다.
＃이상남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1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엘가 위머 PCC (뉴욕), 갤러리 아페르(암스테르담), pkm갤러리(서울) 등에서 17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세비야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등에 참여했다.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회화 설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아우르는 깊이와 현란함, 그리고 세련된 조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상남 작품에 대한 비평은 ‘뉴욕타임즈’,‘월스트리트 저널’, ‘아트 인 아메리카’ ‘아트포럼’ ‘프래쉬아트’ 등에 게재됐다. 오는 9월 서울 청담동 pkm트리니티갤러리에서 개인전 일정이 잡혀 있다.
사진제공=이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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