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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인호의 전원별곡] 제4부 자연과 사람 ⑥전원주택 개척자 이광훈 “땅 욕심은 절반으로 낮추고 집 눈높이는 두 배로 올려야”
1994년 어느 날, 일간지 부동산기자로 수도권 교외 토지거래실태를 취재하러 나섰던 그는 당시 꼬불꼬불한 2차선 도로였던 6번 국도를 따라 양수리로 들어섰다가, 국도를 잠시 벗어나 양수리에서 북한강변을 따라 좁은 길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가도 가도 자동차 한 대도 만나지 않는 외진 길을 계속 들어가자니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길이 워낙 좁아서 차를 돌릴 수도 없어 계속 올라갔더니 갑자기 넓은 동네가 나왔다.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지만 그 동네에 들어선 집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서구식 목조주택 여러 채가 풍광 좋은 자리에 터를 잡고 여기저기 들어서 있었다. ‘별장인가’하고 수소문을 해봤더니 그곳에 집을 짓고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인근 부동산을 찾아 취재를 해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서울로 출퇴근을 하기도 하고, 주말주택으로 이용한다는 얘기였다. 길이 좀 불편해서 그렇지 잠실에서 나오는데 30분 정도 시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산골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해?’

그렇게 자꾸 고개를 드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 양평 일대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살고 있었고, 그 사람들을 만나서 들어본 얘기는 지금까지 살아온 가치관을 뒤엎을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래, 이런 사람들의 얘기를 한번 써보자’

그렇게 결심하고 데스크에 기획안을 제출하여 시작한 연재물이 바로 90년대 전원주택 붐을 일으킨 단초가 되었던 ‘전원에 살고, 재산도 키우고’라는 인기 칼럼이었다. 내친 김에, 유망한 전원주택지를 소개하는 ‘GO! 江마을 山마을’시리즈도 시작하여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매주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탈(脫)서울의 동기와 결과를 기사화하는 작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수도권은 물론이고 충청도까지 내려가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라 50회로 마감을 하게 되었는데, 최종회가 나가던 날 편집국은 항의전화로 그가 일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동안 기사를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스크랩하면서 애독하고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신문 끊겠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계속 연재를 해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우리나라 전원주택의 개척자, 이광훈 드림사이트코리아 대표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신문에 싣지 못했던 전원주택 입문의 기초상식과 전원에 나간 사람들의 얘기를 한권의 책으로 묶어 1995년 ‘전원주택, 나도 주인이 될 수 있다’라는 입문서를 펴냈다. 전원주택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이드북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우리나라가 GDP 1만 불 시대를 열던 무렵이었다. 탈 서울에 대한 욕구가 서서히 일어날 즈음에 그가 펴낸 책은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거의 1주일마다 1만권씩 팔려 나갔고, 교보문고를 비롯한 대형서점의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독차지 했다. 거의 10만부가 넘게 팔린 이 책은 인문서적이 아닌 재테크 관련 서적이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한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두 번째 기록도 스스로 갱신했다. 그 다음해, 전원주택 마련의 실전 가이드북인 ‘전원주택 뚝딱짓기’를 펴내 두 번째로 종합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은 모두 절판됐지만, 그 당시 전원주택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부동산중개업소에는 그의 책이 필독서로 꽂혀 있었고, 답사를 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필수품이었다.

이 일은 그에게도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원생활의 꿈을 심어놓고 정작 자신은 서울권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자기모순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처음 전원주택의 세계로 인도했던 그 산골마을로 들어갔다. 자동차도 사람도 만나지 못해서 낮에도 들어가기가 겁났던 그 동네는 그가 내려간 후 나중에 전원주택의 아이콘처럼 유명해졌다. 그곳이 바로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였다. 그곳에서 8년을 살면서 아이들에게 시골교육을 시켰다. 한 학년에 1반씩 있는 미니학교로 교장선생님이 전교생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시골학교였다. 그 다음에 그가 정착한 곳이 지금의 서이천(이천시 마장면 장암리)이다. 그럭저럭 20년 가까이 전원생활을 하는 동안, 신문사를 퇴직하고 스스로 몸으로 겪은 경험과 철학을 담아서 12년 동안 전원주택 사업을 하고 있다.

그를 만났다.

◎ 20년 전부터 전원주택에 살던 사람들을 숱하게 만났을 텐데,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은

- 서울 교외 한적한 마을에 손수 전원주택을 짓고 유유자적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위관료출신이었으나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에는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숨겼고, 그동안 살면서 알고 지낸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거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현재로부터 완벽하게 실종상태였다.

“세상에서 누릴 건 다 누려 보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남이 만든 잣대에 자로 잰 듯이 살아왔다. 모든 인연을 끊고 ‘나’로 다시 태어나 살다 가려한다” 그가 그렇게 사는 이유였다.

수년간 임종직전 환자들의 마지막을 지켰던 어떤 호스피스가 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일은 ‘내 뜻대로 살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문득 20년 전에 만난 그가 생각났다. 적어도 그는, 그런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때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왜 전원주택으로 나왔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그런 얘기를 했다.

◎ 책이 많이 팔려서 떠밀리다시피 전원주택으로 나간 건가?

- 일종의 의무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동기는 아이들의 교육 때문이었다.

◎ 교육 때문이라면 전원에 살던 사람도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 그게 잘못된 거다. 그때 나는 서울 위성도시 서민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에게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가 상상을 초월했다. 맞벌이를 하던 우리 부부가 퇴근해서 아이 과제물 만드는데 매달려도 매일 밤 12시가 될 정도였다. 대개 뭔가를 만들어 오라고 하는데, 우리 솜씨로 그걸 매일 만들어내자니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집사람이 자모회에 나갔다가 그 고충을 얘기했더니 엄마들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그거 문방구에 가면 다 있어’라고 했다. 다음날 문방구에 가보니 정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내준 과제물이 어떻게 하루밤만에 뚝딱 만들어져서 문방구에 쌓여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직접 만들어본 우리 경험으로는 적어도 수일 전에 스펙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선생님 밑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앞이 암담했다. 집사람도 나도 그래서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처음 시골학교에 내려가서 집사람이 인사차 선생님을 찾아, ‘작은 선물’을 놓고 왔다. 저녁때 아이 편에 선생님의 편지가 왔다. ‘성의는 고맙지만, 이걸 받게 되면 다른 아이들과 달리 챙겨야 하는 의무감이 생길지도 몰라 마음만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선물은 되돌아왔다.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을 키운 6년 세월이 참 행복했다. 이제 둘 다 대학생이 된 우리 아이들은 부모인 우리에게 가장 감사하는 일로 저들을 시골에서 키워준 것이라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전원생활은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Forest Hill-양평

◎ 시골에서 자랐다는 것이 어떻기 때문에 그렇다는 건가

- 나도 물었다. 그런데 아이들도 콕 집어서 말은 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거나 생각을 말하게 되는데, 그때 서울에서 자란 친구들이 그런다고 한다.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고.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그런다고 한다.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냐’고. 말하자면 그런 차이라는 거다. 그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자수성가하여 강남에서도 잘 나가던 어떤 사람이 주말주택을 마련하기 위해 상담하면서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지. 흙속에서 뒹굴며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촌놈의 뒷심이 없었다면…. 그런데 만날 게임기만 끼고 살고, 지하철도 혼자 탈줄 모르는 아들 녀석이 내가 이룬 것을 제대로 지켜내기나 할까?”

그래서 주말만이라도 아들을 끼고 시골에 내려가 흙에 뒹굴려고 한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이, 뭔지는 모르지만 소중한 것을 얻었다고 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 2000년부터 전원주택사업을 시작했는데, 관찰자에서 주관자로 바뀌고 보니 무엇이 다르던가.

- 돈이라는 것의 방향성 같은 게 있더라. 그 흐름을 타야 하는데, 나는 전원주택과 타운하우스 같은 저밀도, 친환경주택에만 올인을 했기 때문에 갈아탈 말이 제한적이었고 그만큼 부침도 많았다.

◎ 그래도 나름대로 전원주택의 모델을 정립하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 처음 양평에 단지를 개발하던 당시에는 대부분의 개발업자들이 땅만 개발해서 팔아먹고 집은 알아서 짓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주택이 다 들어선 그럴듯한 단지가 수도권 전체를 통틀어서 전무하다시피 했다. 결국 먼저 들어간 사람만 손해를 보게 돼 있었다. 그럴 때 땅과 집을 동시에 계약하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고 버텼다. 전체 30세대 중에서 그렇게 버티면서 15채를 분양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15채의 전원주택이 들어선 다음에 나머지 15필지는 한 달 만에 다 팔렸다. 단지가 활성화되려면 집이 들어서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Forest Hill-남양주 평내

◎ 전원주택 최초로 공개분양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 2002년도에 남양주 평내지구에 단지를 개발하면서 그렇게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전원주택 시공업체를 모두 불러 모아서 공개 경쟁을 통해 10개 모델을 선정하고, 그걸 샘플하우스로 지어놓고 수요자들이 고르도록 했다. 전원주택에 표준형 샘플하우스 개념을 그때 처음 도입했다. 다 완성된 샘플하우스를 공개하는 주택전람회도 우리나라 최초로 했었다. 그 덕분에 당시 아파트가 미분양되던 상황에서도 평균 경쟁률이 20대 1이 넘었다.

◎ 그러다가 신도시로 사업지를 옮겨 고급 타운하우스단지 개발을 했는데,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던 걸로 안다.

- 2006년 당시 고급 타운하우스가 한때 인기 상승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시장이 원하는 모델을 내놓아야 했는데, 사업규모가 있다 보니 1군업체와 PF사업으로 진행을 해야 했고, 칼자루는 1군업체가 쥐고 있으니 내 뜻대로 진행을 할 수 없었다.

전원주택 사업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고급주택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심이 시장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게 한 측면도 있었다. 각자 절반의 책임이 있었다.

사업적으로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새로운 건축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집’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과연 무엇인가, 이런 점에서 많은 공부를 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 서이천에서 하고 있는 Compact House 사업이다.

◎ 결국 다시 전원으로 돌아왔는데, Compact House란 구체적으로 어떤 집을 말하는가

- 나 자신도 겪은 일이지만, 처음 전원주택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땅의 넓이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최소한 150평은 돼야 한다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럭저럭 20년 가까이 살아보니, 4식구 먹을 채소밭은 5평이면 충분하더라. 여름 뙤약볕아래 잡초뽑기는 10평도 버거웠다. 잔디도 깔고, 채소밭도 만들고, 꽃도 심고, 하고 싶은 일이야 많지만 땅은 생물이라 그저 가꾸어지지 않는다. 결국에는 잔디밭 갈아엎고 콘크리트로 덮거나 자갈을 까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땅이라는 것은 감당할 만큼만 가져야 땅을 딛고 사는 행복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그래서 땅에 대한 욕심은 절반으로 줄이고, 집에 대한 눈높이는 2배로 올려서 좋은 집을 장만하는데 돈을 투자하라고 하고 싶다. 누구나 가진 돈은 제한적이고, 땅에 욕심을 부리게 되면 건축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몸이 감당해야 한다. 그게 얼마나 미련한 선택인지는 대충 지은 전원주택에 살아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서이천 동연재 조감도

◎ 그렇지만, 전원주택은 집 자체의 가치가 세월이 지날수록 떨어지기 때문에, 땅값 상승분으로 투자비를 보전해야 하는 구조라서 일정 규모의 땅은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누구나 있다.

-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일반적으로 전원주택은 관리비가 많이 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Compact House를 지으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이 단열과 열효율, 그리고 친환경 건축이었다. 통상 목조주택을 지을 때 외단열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하더라도 단열재 두께가 30㎜를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100㎜ 단열재로 외단열을 하고, 고효율 건식 난방시스템, 독일식 시스템창호를 접목하니 유지비가 아파트의 절반도 들어가지 않더라. LPG가스로 가스보일러를 가동하는데 도시가스보다 유지비가 오히려 적게 들어간다. 도시가스가 LPG보다 싸면 뭐하나. 집 자체가 연료를 많이 소모하면 아무 의미없다. 중요한 것은 집 자체의 경제성이다.

이런 집을 규격화해서 단지화하게 되면 집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걸 증명해보고 싶다.

◎ 지금 추진하고 있는 서이천 동연재 단지는 어느 정도 규모인가.

- 이 단지는 10년 전에 전원주택단지로 개발된 택지다. 그때는 큰 땅이 유행이라 1필지가 대부분 200평 넘게 구획돼 있다. 이걸 3~4필지로 분할해서 대지면적 60~80평 전후 규모에 건축면적 40~50평 규모의 Compact House 약 30세대를 조성할 계획이다. 1층 바닥면적이 약 20평이기 때문에 적어도 30~40평의 앞마당이 나온다. 서울에는 30평짜리 대지에 들어선 집도 엄청나게 많다. 그런 집에 비하면 결코 작은 마당이 아니다. 이 콘셉트가 맞아 떨어져서 호응이 좋으면 단지 내 다른 지주들도 동참할 의지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50세대 정도의 Compact House가 들어설 것으로 본다.

지금 이천은 지역의 골치덩어리였던 하이닉스가 SK그룹으로 넘어가 안정 국면에 들어섰고, 판교에서 여주까지 연결되는 전철 공사가 박차를 가하고 있고, 서이천IC 주변으로 LH공사의 택지개발사업 2곳이 추진중이고, 롯데 패션아울렛이 내년 개장 예정으로 개발중이어서 어떤 곳보다 개발호재가 많다. 그래서 수도권 전지역을 통틀어 지난해부터 아파트값이 떨어지지 않는 4곳(평택,안성,오산,이천) 중의 한곳이다. 동연재 Compact House와 전용면적이 비슷한 50평대 아파트 시세가 4억 원이 넘는데, 그보다 1억 원이 싸다. 아파트와 비교해도 가격경쟁력이 있다.

◎ 마지막으로, 사람에게 집은 무엇인가.

- 양평 문호리에 살 때 그곳으로 내려와 미술학원을 하던 선생이 있었다. 서울에서 학원을 할때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학생이 상담을 하러 와서 Test Drawing을 시켜 보면, 그 애가 단독주택에 사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99%는 맞추게 되더라는 것이다. 색의 종류, 색감, 명도, 채도가 확연하게 다르더라는 얘기였다. 집이란 그런 것이다.

꽤 유명한 어떤 주택업체가 아파트 광고를 하면서 ‘집이 사람을 만듭니다’라는 헤드 카피를 썼는데, 정말 어이가 없더라. 그런 집을 팔아 놓고 집이 사람을 만든다니. ‘우리 아파트에 살면 애들 완전히 망가집니다’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카피에 담긴 진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만.

나하고 집과 사람의 정신세계 형성에 대해 한참동안 토론을 했던 어떤 유명한 정신과 의사선생님은 ‘나중에 아파트만 지은 업체들을 모두 형사고발하겠다’는 극언을 하기까지 했다.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살아야 하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특성상 아파트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생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 것은 비극이다. 한번은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적어도 인생을 시작할 시점, 그리고 마감해야 할 시점에는.

문의:(031)638-6138, 010-9489-9938

http://blog.naver.com/micess2010


(헤럴드경제 객원기자,전원&토지 칼럼리스트,cafe.naver.com/r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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