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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흔 꽃중년의 판타지, 나도 ‘신사’가 될수있을까
남자 고교 동창 4명이 마흔한 살이 되도록 거의 매일 만나 ‘애’처럼 사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대리만족을 줄 만하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해 가정을 가진 남자들은 대부분 사적인 공간을 거의 잃어버리고 ‘생존(生存)’의 공간만을 가지고 있다. ‘실존(實存)’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쳐보지만 현실의 조건은 녹록지 않음을 알고 있는 남자라면 이 드라마가 가벼운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장동건 김민종 김수로 이종혁 등 4명이 연기하는 극 중 배역은 모두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성공한 자유직에 종사하는 남자이며, 직장인의 ‘로망’이다. 장안의 화제인 SBS 주말극 ‘신사의 품격’ 이야기다.

마흔이 넘어도 아랫배가 조금도 나오지 않은 20대 몸매를 유지하며 능력을 자랑하는 ‘꽃중년 F4’는 일종의 판타지다. 8회에서 이정록(이종혁 분)-박민숙(김정란 분) 부부 동반모임을 보면 이들이 또래 아저씨들과 함께 놀 수 있는 ‘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민숙이 연상녀라지만 겉모습으로만 보면 이 부부는 함께 나온 친구 부부들과 열 살 이상 차이 나 보인다.

남자가 40대 초반이 되면 대학 시절의 자유로움은 저당 잡힌 지 오래다. 직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소신과 철학을 접어야 하고, 그럴수록 집에서는 아내와 자식에게 여유 있고 살갑게 다가가기 힘들다. 하지만 ‘신사의 품격’ 4인방은 책임질 가족이 없다. 변호사 최윤(김민종 분)은 아내와 사별한 상태이며, 바람둥이 정록은 아내 민숙이 강남에 빌딩을 수십채 소유한 부자다. 그래서 이들은 소년 같은 면을 유지할 수 있다.

PC방에서 게임에 열을 올리고 당구게임비 하나에 목숨을 거는 ‘찌질함’도 보인다. 커피숍에서 걸그룹 소녀시대 수영을 보고는 4명 중 가장 철이 먼저 든 변호사 최윤이 달려가 춤을 추며 재롱을 떤다.

건축디자이너 김도진(장동건 분)은 섹시한 남성미에, 까칠하며 비꼬는 말투를 자주 사용하지만 친구들과는 장난기를 발동시킨다. 짝사랑하던 서이수(김하늘 분) 앞에서는 너스레와 능청을 떨다가도 질투심을 보이기도 하고 진지하게 사랑을 고백할 줄도 안다. 서이수가 짝사랑했던 임태산(김수로 분)은 친구를 좋아하고 의리 있으면서도 자신의 여자 홍세라(윤세아 분)에게만 잘하는 ‘순정마초’ 기질을 지니고 있다.


이 4인방의 감성은 ‘소년’이다. 1990년 초 대학 시절을 보낸 이들을 통해 20년 전에 지녔던 소년의 감성을 소환한 것이다. 92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음악을 들고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하고 전람회의 94년작 ‘기억의 습작’을 들었던 세대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짓누르던 반공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났으며, 풍요 속에 자라나 개인과 개성을 당당하게 주창한 ‘X세대’였다.

하지만 이들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적당히 찌들어버렸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이전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낀 세대’가 됐다. 그래서 남성 시청자들은 소년 같은 이들의 감성에 더욱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판타지는 현실에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기제일 뿐이다. 그럼 ‘신사의 품격’ 네 남자보다 머리숱도 훨씬 적고 배도 나온 이 땅의 중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드라마 속 남자들처럼 살 수는 없지만 드라마 제목인 ‘신사’라는 단어 뜻 정도는 새겨봐야 할 것 같다. 중년 남자들은 힘들다. 가족을 부양하며 건강도 챙겨야 하고, 젊은 아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꼰대’도 되지 말아야 한다. 드라마 제목에 나오는 신사란 ‘꼰대’의 반대말일지도 모른다.

젠틀맨이 되지 못한 시시한 아저씨들이 신사가 되는 계기는 물론 사랑이다. 4인방에게 물질적 조건이 더 나아진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미드(미국 드라마)’식 쿨함을 유지하던 이 드라마에 어울리지 않게 콜린(이종현 분)의 출생의 비밀이라는 떡밥을 던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모두의 평화 같은 건 관심없고, 중요한 건 내 마음씨이고 자존심”이라던 김도진과 이제 막 달콤한 사랑을 하게 된 서이수. 김도진이 콜린의 친부로 드러나며 서이수와의 사랑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임태산도 화려한 홍세라가 사실은 경제적 궁핍에 처해 있는 현실을 알고 도우러 나선다. 열일곱 살 어린 임메아리(윤진이 분)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민하는 최윤, ‘청담마녀’ 박민숙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압구정 날라리’ 이정록은 각각 어떻게 ‘신사’가 될 것인가?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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