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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개발국 위한 종자실험…‘9개의 씨앗’희망을 잉태하다
[더하라둔(인도)=이해준] 인도 북서부 우타르칸트의 주도인 더하라둔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을 더 들어가야 하는 나브단야의 비자 비디야피트 농장. 이곳은 관광지나 역사적인 유적지가 아니다. 여행안내서에도 소개되지 않는 곳이다. 한국인 여행자도 거의 없다. 하지만 필자 가족은 여기서 7박8일이나 머물렀다.
이곳에 오려고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e-메일을 보냈다. 콜카타에서 기차로 30시간을 달려 델리에 도착해서는 바로 나브단야 사무실을 찾아 농장 방문 일정을 재확인했다. 인도 북서부의 외진 곳을 왜 그렇게 방문하려 했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계와 우리 시대의 희망을 찾아 지구촌을 누비리라 작정한 필자 일행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었다.
델리에서 기차로 7시간을 달려 더하라둔에 내리자 남루한 인도 중소도시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길거리는 지저분하고 노점상과 오토릭샤, 행인 등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거기서 비크람(오토릭샤)을 타고 버스정류장으로 간 다음, 다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농촌 마을을 한참 달렸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농장에 들어서자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이곳이 인도와 제3세계 농업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인도의 사회운동가 반나나 시바가 세운 비정부기구(NGO) 나브단야의 실험농장이었다. 필자 가족은 여기에서 1주일간 자원봉사를 하며, 이곳이 추구하는 대안을 체험하고 싶었다.
필자 가족이 도착했을 때는 높은 산에 눈이 쌓일 정도로 쌀쌀한 겨울철이었음에도 10여명의 외국인이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자원봉사도 하고, 공부와 연구도 하고 있었다. 농장은 깨끗하게 정비돼 있었고, 현지인은 물론 주로 유럽과 미국인으로 이뤄진 체류자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평화와 여유가 넘쳤다.
도착 이튿날 인도인 스태프가 필드(농장)를 함께 돌아보며 나브단야와 농장을 소개했다. 47에이커로 매우 넓은 농장 곳곳에서는 다양한 작물의 시험재배와 지렁이를 이용한 퇴비화 실험 등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무실 주변엔 게스트가 묵을 수 있는 2동의 숙소가 있어 수십명이 체류할 수 있다. 100명 정도가 들어가는 강의실, 도서관, 토양연구실 등 연구실이 있었다.
이곳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시드뱅크(Seed Bankㆍ씨앗은행)다. 건물 한 동에 다양한 씨앗이 보존되고 있었다. 벼(쌀)의 경우 600종 이상, 야채 종류는 120가지, 밀 종자는 130개가 넘었다. 유채를 비롯해 기름을 짜서 먹을 수 있는 씨앗은 30가지, 향신료로 불리는 스파이시(Spices)는 40개가 넘었다. 안내를 맡은 인도인 스태프는 이 씨앗을 매년 봄 파종해 가을에 수확한 다음 교체한다고 했다. 나브단야는 여기 말고도 16개주에 60개의 시드뱅크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으며, 계속 확대하고 있다.
나브단야가 씨앗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것이 저개발국 농민의 희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씨앗은 기후와 토양 여건에 맞추어 농사를 지어온 농민과 공동체의 경험이 농축된 결정체다. 하지만 저개발국에서 그 종자의 비밀은 일상생활에 녹아들어 있을 뿐, 유전자 배열과 같은 현대과학으로 정립되거나 기록되지 않았다. 특허로 등록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이 여기에 일부 생명공학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종’으로 등록하고 특허를 주장하면서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농업의 산업화가 가속화하면서 유전자조작(GMO) 품종이 저개발국에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은 수익을 더 올릴 것처럼 보이지만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몇년만 GMO 품종을 재배하면 현지의 토종씨앗은 사라지고, 농민은 이들이 판매하는 씨앗과 농약, 비료 등을 매년 비싼 값에 구매해야 한다. 그로 인해 소득이 오히려 줄어들고 빚은 늘어나 자살하는 농민도 속출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한 것이 시드뱅크다. 나브단야란 힌두어로 ‘9개의 씨앗’을 의미한다.
농장의 생활은 단순하다. 체류비로 1인당 하루 700루피(약 1만8200원)를 지불하면 숙식을 모두 제공한다. 식단은 이 농장 및 인근 마을에서 유기농으로 생산해 만든 인도 전통요리다. 오전과 오후엔 간식으로 짜이(인도 전통의 밀크티)를 제공한다. 다만 몇 가지 지켜야 할 수칙이 있다.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화학제품 사용이나 쓰레기 배출을 자제해야 한다. 농사도 유기농으로,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온수는 태양열을 이용한다. 친환경적인 ‘느림의 삶’을 체험하는 현장인 것이다.
필자 가족이 방문했을 때는 농한기였지만, 퇴비 만들기와 파종을 위한 밭고르기 등의 일이 매일 진행됐다. 하지만 농사일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아 뭘할까 망설이던 차에 인도인 스태프가 혼자 정원을 손질하는 게 눈에 띄었다. 필자 가족이 거들고 나섰다.
처음에는 그저 정원의 풀뽑기 정도로 생각했으나, 5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면서 일이 점차 커져 나중에는 정원을 리모델링하는 수준으로 확대됐다. 인도인 스태프나 외국인 자원봉사자도 필자 가족의 일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몇 개월 여행을 하다 한 곳에 정착해 ‘가드닝(Gardening)’을 하는 것은 신나고 즐거운 체험이었다.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물 만난 고기와 같았다.
매일 오전에는 정원을 손질하고, 오후 짜이 시간 후엔 인도인 스태프와 간이 축구도 하고, 족구도 하고, 배구도 하는 등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가드닝을 하다 좀 지루하다 싶으면 농장을 산책하거나, 인도인 스태프와 함께 인근 숲을 돌아보기도 했다. 적절한 노동과 휴식이 결합되니 중국~네팔~인도를 여행하며 쌓인 피로를 푸는 기회도 됐다.
체류 5일째 나브단야 설립자인 반다나 시바가 농장에 들렀다. 인도 전통의상을 입은 시바 박사는 외모로는 인도의 중년아줌마 같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와 반짝이는 눈동자는 오늘날 세계 지성계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체류자와 함께 만난 시바 박사는 나브단야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현재의 지배적인 세계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금융위기를 겪고 있지만 이것이 나브단야의 성장을 촉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인도의 우타르칸트 주가 5년 전 유기농 지역을 선포하고, 부탄 정부가 전체를 유기농 국가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며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시바 박사는 현재의 지배체제인 글로벌 자본주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나브단야의 활동은 농업을 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총체적인 변화를 위한 운동”이라며 생물과 문화의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에 앞으로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필자 가족은 자원봉사를 하면서 농업의 새 희망을 확인하고자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한 삶(sustainable lifestyle)’의 한 원형을 발견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자연을 약탈하고 약육강식의 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삶이 아닌,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의 가능성을 체험한 것이었다.
농장에 체류한 1주일 동안 아이들과도 이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거창한’ 문제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었지만, 대체로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서의 체험이 앞으로 개척해 나갈 삶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필자 가족이 떠나는 날 현지인과 외국인 체류자가 따뜻하게 환송해주었다. 이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리고 작지만 이런 새 삶에 대한 시도가 확산될수록 세상은 더 따뜻하고 행복하게 될 것으로 생각됐다. 이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하루 한걸음 가족’이 1주일 동안 정성들여 만들어놓은 멋진 정원을 즐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떠나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자유기고가/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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