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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로시티’ 하동에서 사색과 휴식을 취해봄이...
[하동=서병기 선임기자]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휴식이 절실하다. 쉰다고 마음의 무거운 짐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조용히 걸으며 사색과 명상에 잠기다 보면 몸과 마음이 약간은 가벼워짐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공간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나는 그런 곳 중 하나로 점점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경남 하동군의 악양 들판을 강력 추천한다. 하동군 악양면은 이미 2009년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시에 있는 슬로시티 국제본부에서 실사를 거쳐 ‘슬로시티’로 인증받았다. 그만큼 웰빙하기에 좋은 공간이라는 걸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하동은 복받은 땅, 산과 강, 바다가 한 품에

사실 국내에서 하동만큼 복받은 땅은 그리 많지 않다. 산과 강, 바다를 한 품에 싸안고 있는 고장이다. 그 산이 보통 산인가. 깊고 묘한 정기가 느껴지는 지리산이다. 하동의 청암면을 거쳐 청학동 지리산 자락으로 넘어가다 보면 중간에 ‘신선’을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동의 지리산과 야산은 대표적인 슬로푸드이자 하동의 특산물인 야생차와 수많은 산나물을 제공한다. 강은 깨끗하면서도 고운 모래를 지닌 섬진강이 아닌가. 모래를 만날 수 있는 강은 이제 별로 많지 않은데, 섬진강의 풍부한 금빛 모래는 보기만 해도 좋다. 그곳에서 잡아올리는 재첩과 은어는 하동의 별미다. 바다는 ‘한려수도’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명성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하동은 진교면 아래에 위치한 금남면과 금성면, 두 곳이 남해와 접해 있다. 그래서 사시사철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게다가 구례에서 시작해 하동포구 80리를 끼고 남해대교를 넘는 19번 국도는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지금이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봄ㆍ가을이면 누구나 드라이빙을 즐기러 나오는 코스가 됐지만 1990년대 초만 해도 여행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사람들이 몰려올까 봐 기사화를 꺼린, 대표적인 도로로 꼽힌다.

▶슬로시티의 고장, 악양 평사리 들판과 최참판댁

악양면은 ‘웰빙의 고장’ 하동 중에서도 백미다. 하동군의 1개읍, 12개면 가운데 하나로 14개의 리(里)와 30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다. 지형적으로는 삼면이 지리산의 우람한 산줄기와 준령들에 둘러싸인 분지다. 멀리 지리산 삼신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시루봉 부근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악양 들녘과 마을들을 에워싼 형국이다. 평지에는 드넓은 평사리 들판이 있고, 그 너머 물 맑기로 유명한 섬진강이 흐른다. 이런 산골짝 어디에 그렇게 너른 평야가 있을까 의심이 갈 정도다. 지리산 형제봉의 치맛자락에 해당하는 악양 들판은 한국전쟁 때 빨치산과의 전투가 치열했다. 박경리 선생이 26년 동안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고, 드라마 ‘토지’ 촬영지인 최참판댁의 문전옥답이 바로 이곳이다. 

점점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가득 안은 하동 악양의 평사리 들판과 하늘의 구름, 중앙의 부부송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한 번쯤 사색과 여유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하동군에선 한 공무원의 아이디어로 소설의 명성을 빌려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지세 좋은 곳에 소설 속 최참판댁을 재현해놓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평사리 언덕배기의 최참판댁에서 빗장을 열면 악양 들판의 풍경이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최참판댁의 후손이 지금도 이 주변에 살고 있느냐”며 묻는 관광객도 있다고 한다. 스토리텔링 기법의 리얼리티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생긴, 재밌는 현상이다.

악양(岳陽)은 백제를 침공한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중국 후난 성(湖南省)의 악양과 닮았다고 해서 처음 붙인 명칭이다. 이 평지에서 무려 2만여석의 쌀이 생산된다고 한다. 과거 겨울을 지내는 게 급선무인 거지가 12월 초 악양에 들어와 한 집씩 밥을 구걸하며 마을을 돌아나갈 때쯤이면 추위가 풀리는 3월이 된다고 할 정도로, 풍부한 곡식과 인심을 자랑한다.

▶최참판댁 위에서 색다른 한옥 체험을~

드넓은 악양 들판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최참판댁을 가봐야 한다. 최참판댁은 악양 들판과 섬진강 물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상평마당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다. 일년 내내 방문객이 이어지는 최참판댁은 14동의 한옥으로 구성됐다. 주변에는 드라마 ‘토지’의 오픈 세트로 활용된 초가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정감 넘치는 시골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요즘은 주변에 아메리카노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카페도 생겨났다.

나는 최근 최참판댁보다 약간 높은 곳에 지어진 한옥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여름인데도 저녁과 아침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자연의 바람을 느끼며 대청마루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요, 웰빙이다. 하동군에서 ‘토지’에 나오는 김훈장댁 세트와 새로 지은 한옥을 3인 이상으로 신청하는 사람에 한해 비싸지 않은 비용으로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내가 머무는 날에는 스페인에서 온 젊은 부부가 와 있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었다”면서 “베리 굿”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악양 평사리 들녘을 비롯해 하동이 전체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깨끗한 슬로시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연경관을 해치는 시설물을 최대한 설치하지 않으려는 조유행 군수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다.


▶악양의 걷기여행

이런 악양을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군에서는 슬로시티 악양의 걷기여행 코스 6개를 만들어놨다. 시간이 없다면 ‘평사리 삼거리→최참판댁→한산사→고소산성→한산사→고소산성 입구’의 1코스(5.8㎞), 좀 더 여유가 있다면 ‘대봉감마을→문암송→만수당→공설시장→취간림→매암 차문화박물관→최참판댁→악양 들녘의 쌍소나무→동정호→평사리 삼거리’의 3코스(8.9㎞)를 추천한다. ‘매암 차문화박물관에서 출발해 조씨 고가→상신마을 돌담장길→노전마을 삼거리→십일천송→취간림’으로 이어지는 2코스(7.4㎞)는 아기자기하다.

한산사에서 오붓한 산길을 따라 20분가량 걷다 보면 나타나는 고소산성 길은 등산과 걷기를 겸한 새로운 체험이다. 걷다 보면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축마을의 문암송, 11그루의 소나무가 둥그렇게 모여 오순도순 살고 있는 노전마을의 십일천송을 보는 것도 낙이다. 평사리 들녘 한가운데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다. 이들 소나무, 일명 ‘부부송’이 없었다면 그 넓은 들녘의 허허로움은 어떻게 채워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황금빛 들녘과 어우러진 쌍소나무는 ‘토지’의 주인공인 서희와 길상처럼 다정하게 서 있다. 그 옆에 있는 동정호는 지금은 늪처럼 변했지만 주변 경관과 그런대로 어울린다. 악양 걷기여행의 마무리는 평사리공원에서 하면 된다. 섬진강은 예부터 ‘다사강(多沙江)’이라 불릴 만큼 고운 모래가 많다. 평사리의 섬진강변에는 해수욕장처럼 넓은 백사장을 거느리고 있다. 강변에는 평사리공원이 조성돼 있다. 하룻밤 묵으며 야영할 수도 있다.

이 밖에도 하동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 다양한 문과 전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매력을 느끼게 하는 쌍계사, 쌍계사 서쪽 반야봉 남쪽에 자리한 칠불사, 계곡이 깊은 청암면 묵계리의 청학동과 삼성궁, 하동읍 섬진강변의 송림공원, 하동포구 공원도 둘러볼 만하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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