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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란 선임기자의 art & 아트> 텅빈듯 꽉찬듯…‘물방울속 우주’ 대만을 홀리다
김창열 화백 국립대만미술관 개인전
40여년 예술궤적 47점 오롯이 담아
‘동·서양 아우르는 세계’극찬 잇달아

“40년 외길 불구 득도 근처에도 못가
안보이는 것 보려고 계속 애쓰는 중”


방울방울 맺혀 톡 건드리면 떨어질 듯한 영롱한 물방울이 대만인들을 사로잡았다.

‘물방울 그림’으로 잘 알려진 김창열(83) 화백이 대만의 중부도시 타이중의 국립대만미술관에서 지난 3일 개인전 개막식을 가졌다.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김 화백은 이미 파리 퐁피두센터와 주드폼미술관, 베이징 국립국가박물관 등에서 작품전을 가진 데 이어 이번에 대만에서의 대규모 작품전에 40여년 예술궤적을 풀어놓았다.

1988년 개관한 국립대만미술관은 연간 110만명이 찾는 대만 유일의 국립미술관으로, ‘아시아 아트비엔날레’ 등 아시아 예술교류에 앞장서왔다. 한국 작가가 이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은 김 화백이 처음이다. 대만 문화부 초청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는 1964년부터 최근작까지 각 시기를 대표하는 그림 47점이 내걸려 물방울 그림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다. 또 투명한 물방울을 유리로 빚은 설치작품 2점도 나왔다.

개막식에서 황차일랑(63) 대만미술관장은 “지극히 동양적인 세계를 서양의 조형성과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정말 특별하다. 극사실주의를 전제로 초기 차가운 느낌이었던 물방울은 물의 흔적과 번짐효과가 가미되고 천자문과 컬러가 곁들여지며 생명력과 호흡이 생겼다”고 평했다. 린히샤오유 대만미술관 큐레이터는 “화폭 가득히 매달린 물방울을 대만인들이 너무 좋아하고 있다. 교육을 받던 도슨트(전시해설사)들은 탄성을 지르더라”고 했다. 또 대만을 대표하는 아트컬렉터인 린밍저 산(山)예술문화기금회 회장도 “20여년 전부터 김 화백 그림을 봐왔는데 늘 매혹되곤 한다. 비어있으면서도 꽉 차있는 그 세계에 탄복하게 된다”고 했다. 

김창열 화백이 국립대만미술관에 40여년 예술궤적을 풀어놓았다. 그는 “달마대사는 9년간 벽만 들여다보고도 득도했는데, 난 물방울을 40년이나 그렸는데도 득도는커녕 근처에도 못 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김화백은 “변변찮은 그림을 갖고 이 좋은 미술관에서 전시를 갖게 됐다. 달마대사는 9년간 벽만 들여다보고도 득도했는데 나는 40여년간 물방울을 그렸지만 득도는커녕 근처에도 못 갔다”고 답했다. 이어 “어째서 죽자하고 물방울만 그리느냐고 많이들 묻는다. 물방울의 노예가 된 건 사실이다. 헌데, 마누라가 예뻐서만 같이 사는 건 아니지 않는가? 여러 가지 인자(因子)가 있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미대를 거쳐 1960년대 뉴욕에 이어 파리에 정착한 그가 물방울 그림을 처음 그린 곳은 마굿간이었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마굿간에서 먹고 자며 작업했던 김 화백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지우길 반복하던 중 화폭 뒷면에 뿌려놓은 물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걸 발견했다. 물방울들이 너무 장엄했다는 그는 이후 점액질 같은 물방울에서부터 곧 흘러내릴 듯한 물방울, 화폭을 뒤덮는 올오버식 물방울, 천자문 위에 얹혀진 물방울 등을 잇달아 탄생시켰다. 잠시 후면 곧 소멸될 물방울이지만 한순간 더없이 찬란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극사실적이지만 지극히 초현실적이다. 또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작가의 소망이 드러난다. 

언제부턴가 흰 수염을 길러 도인처럼 보이는 김 화백은 스스로의 생명철학을 절제된 색채와 주제로 표현함으로써 이제 선(禪)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 김 화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는 작업이 곧 그림”이라며 “내 그림을 보는 이들이 마음껏 상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03년작 Bell, Acrylic and oil on canvas.

이번 출품작 중 ‘제례’(1966년ㆍ162x134㎝)라는 그림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깃들어있다. 오로지 혁신적 예술을 갈망하며 단돈 5달러만 지닌 채 뉴욕 땅을 밟은 청년 화가를 품은 사람이 있었으니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김주봉(79ㆍ전 국회도서관장)이었다. 그는 갈 곳 없는 화가를 자신의 집으로 끌여들여 큰 방을 내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김 화백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열정적으로 작업했다. 그리곤 몇 년 후, 김주봉 씨가 결혼을 하게 되자 “결혼선물로 냄비세트를 사주고 싶지만 돈이 모자라니 이 그림으로 퉁치자”며 문제의 그림을 선물했다. 김 씨는 흔쾌히 그림을 받았고, 45년간 간직해오다 이번에도 작품을 대여해줬다.

김주봉 씨는 “주위에서 ‘냄비를 받았으면 어쩔 뻔했냐’며 놀린다. 나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냄비 대신 받은 김 화백 그림은 뉴욕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어서 우리 집에 걸려 있다가도 수시로 여러 미술관에 대여되곤 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말년에 김 화백 때문에 바쁘다. 앞으로도 (친구들과 함께) 지구 끝까지 따라갈 것”이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3일 개막식에는 마잉주 대만총통이 축전을 보냈으며, 대만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와 조각가 심문섭, 표미선 한국화랑협회장(표갤러리 대표) 등 100여명의 인사가 참석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0일까지 계속된다.

타이중(대만)=글ㆍ사진=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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