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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건 명품 추구하면서도 우리 먹거리는 왜 홀대할까?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설이 코 앞인데도 날씨가 매섭다. 한파 때문에 몸이 자꾸 웅크러든다. 그런데 코 끝이 싸할 정도로 추운 날씨가 장 담금기 가장 좋은 때다. 매년 음력 정월(1월)무렵은 장(醬) 담그는 적기다. 자고로 ‘정월에 담근 장이 가장 맛있다’는 말도 있다. 한파에 담가야 장이 잘 상하지 않고, 벌레도 잘 안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대도시 젊은 세대들에게 장 담그는 일은 완전히 남의 일이다.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 가면 온갖 장류가 즐비하니, 사서 먹으면 그만일 뿐이다. 그러니 장을 담그는 게 뭔지, 그 과정이 어떤지 알 리가 없다.

하지만 ‘놀라운 발효과학과 자연의 산물’인 전통 된장과 간장은 영양의 보고로 알려지면서 연구자 및 셰프들로부터 날로 각광받고 있다. 식품영양학 전문가들은 된장, 간장 등 우리의 발효식품의 우수성을 밝히는 논문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한국음식당 최초로 미슐렝가이드로부터 별을 부여받은 맨해튼의 한식당 ‘단지(DANJI)’의 주인이자 셰프인 후니 킴 씨는 “전통방식 그대로 정성껏 만든 된장만 있으면 별다른 재료를 많이 넣지 않아도 그 음식맛이 뛰어나다”며 구수한 콩의 감칠맛이 오래오래 나서 외국인들도 무척 좋아한다고 전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웰빙식품인 된장과 간장을 전통방식 그대로 만드는 현장을 찾아가봤다.

한반도의 꼬리, 경북 포항에서 승용차로 1시간30분은 달려야 닿는 죽장면 상사리의 장류업체 ‘죽장연(竹長然)’. 그곳에서도 요즘 장 담그기가 한창이다.
경북 청송에 인접한 고도 450m의 산간마을인 죽장면은 고려로 편입되길 거부한 신라의 마지막 귀족들이 산 깊은 곳을 찾아흘러든 지역이어서 ‘대쪽처럼 꼿꼿하다’는 뜻에서 죽장(竹長)이란 이름이 붙은 곳이다.
죽장면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인 상사리에는 프리미엄 빈티지(Vintage) 전통장을 만드는 회사 ‘죽장연’이 있다.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유명 아티스트 정연두(44)가 디자인한 멋진 벽돌아치를 지나자, 4000여개에 이르는 항아리가 찾는 이를 반긴다. 열과 오를 맞춰 늘어선 장독대가 겨울 햇빛을 받아 환하게 반짝인다.

계단식으로 지어진 장독단지 아래쪽에는 현대식 설비를 갖춘 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죽장연은 설비는 현대식이지만 공정은 철저히 10단계에 이르는 전통방식을 따르고 있다. 즉 콩세척-가마솥에 가열-증숙-메주제조-건조-발효-건조-장 담그기-숙성-포장 등의 단계다.
가장 먼저 메주콩을 삶는 현장을 찾았다. 고소한 콩 읽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70㎏들이 대형 가마솥에서는 새하얀 김이 펄펄 뿜어져나오고 있다. 죽장면 주민이자 직원인 김옥자 씨를 비롯한 주민들이 끓는 가마솥의 물이 넘치지 않도록 솥 표면에 찬물을 살살 부어가며 물기를 헝겊으로 닦고 있다. 


가마솥 안에는 죽장면에서 수확한 콩이 막 삶아지고 있다. 김옥자 씨는 “장 담글 때 제일 중요한 게 좋은 콩을 골라, 이를 잘 삶는 것”이라며 다섯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센 불에 40분쯤 삶고, 뭉근한 불에 4시간은 뜸을 들여야 콩이 노랗게 잘 삶아진다는데, 콩이 타지않도록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고 귀띔했다. 삶아진 콩은 메주를 만드는 성형실로 옮겨진다. 노랗게 잘 익은 콩을 살짝 떠먹어보니 맛이 아주 좋다. 땅콩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이 삶은 콩을 잘 다진 뒤 사각형의 말랑말랑한 메주를 만든다.
그리곤 깨끗한 볏짚으로 묶어, 나무건조대에 걸어 30~40일간 말린다. 맑은 날에는 건조실의 창문을 열어 공기를 통하게 하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닫아 습도를 맞춰준다. 건조실은 온도 섭씨 5~10도, 습도 30~40%를 유지해야 한다. 메주가 굳으면 황토를 바른 따뜻한 발효실로 옮겨 3~4단씩 쌓고 발효시킨다.

메주가 잘 떴으면 이제는 장을 가를 차례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장 가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잘 떠진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한 달 보름쯤 숙성시키는 게 장 담그기이고, 그 메주를 건저 으깨서 된장을 담근 뒤 그 남은 물을 달여 간장으로 숙성시키는 게 바로 장 가르기이다.

메주만 있다면 일반가정에서도 장을 담글 수 있다.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다. 깨끗한 장독에 잘 숙성된 메주를 넣고 소금과 물을 붓는다. 그리곤 댓가지로 고정시킨 후 숙성시키면 된다. 젊은 세대는 6개월쯤 숙성된 된장을 좋아하나, 중장년층은 적어도 1,2년 이상은 숙성돼야 깊은 맛이 난다며 묵은 장을 좋아한다.


죽장연은 이같은 전통 장 담그기 방식을 따르되, 그 방식을 일일이 기록해 매뉴얼화하고 있다. 정연태(48) 죽장연 대표는 “그렇게 해놔야 장인(匠人)이 없더라도 장맛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건강을 위해 나트륨 섭취를 줄일 것이 권고되고 있는 추세에 맞춰, 장류의 염도를 가급적 낮추고 있다. 죽장연 된장과 청국장으로 만든 된장찌개며 청국장찌개가 슴슴할 정도로 짜지 않은 것도 이 때문. 정 대표는 죽장연 장원이 고도 450m의 서늘한 지역이란 점도 염도를 낮출 수 있는 요소라고 귀뜸했다.

최근 들어 된장은 ‘4차원 식품’으로 불린다. 콩을 곰팡이로 발효시킨 인도네시아의 ‘템페’, 낫토균을 활용한 일본의 ‘낫토’ 등은 모두 1차원 발효식품이다. 반면에 된장은 곰팡이, 세균, 효모를 두루 활용한 복합발효 식품이다. 더구나 된장은 모두 네 차례 발효가 이뤄져 그 같은 닉네임이 붙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 같은 발효과정이 과학으로 입증되기 훨씬 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생태계를 헤아리며 놀라운 발효식품을 만들었다. 효모와 곰팡이, 세균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조상들은 여기에 깨끗한 천일염, 맑은 물, 그리고 청명한 바람과 햇빛까지 활용했으니 그 놀라운 혜안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자연과 세월 외에는 아무 것도 넣지 않지만 최고의 식품이 만들어지는 눈 쌓인 산간마을, 그곳이야말로 오늘 현대인에겐 정신의 안식을 느낄 수 있는 ‘힐링의 현장’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옛 방식 그대로 빚어지고, 숙성된 4차원 식품인 된장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은근하고 오묘하게 발효시킬 것이다. (054)253-8880 www.jookjangyeon.com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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