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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어서 지구 한바퀴… 이희준의 '희망가족'> 하늘서 가장 가까운 ‘쪽빛 호수’ …시야 가린 반투명막이 걷힌듯…
<38> 안데스의 신비 간직한 하늘 아래 첫 호수…티티카카
안데스 심장부 고원에 자리잡은
해발고도 3810m 세계 最高 호수
손에 잡힐듯 청정한 자연의 극치

잉카의 神 탄생했다는 태양의 섬
원주민 지키는 망코카팍 동상 우뚝
신화와 현실 공존…경이 그 자체




[코파카바나(볼리비아)=이해준 문화부장] 남미 여정에 들어간 지 2개월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시작으로 남미대륙을 시계방향으로 반 바퀴 돌아 안데스산맥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다. 남미의 등뼈인 안데스산맥 영역에 들어온 지는 2주가 넘었다. 안데스는 그 광대무변함과 험준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남북 길이는 7000㎞로 세계에서 가장 길고, 동서의 폭도 200~700㎞에 이른다. 그동안 이 산맥을 지그재그로 네 차례 넘으면서 남부에서 중부로 이동, 이제 그 심장부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발길이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티티카카 호수로 향했다. 볼리비아와 페루 접경지역, 그러니까 안데스 중심부인 알티플라노 고원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호수다. 이름에서부터 신비로움이 느껴지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호수는 청정한 자연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 아름다움과 독특한 원주민 문화에 빠져들면서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속살을 드러낸 자연=높이 3650m로 세계 각국의 수도 가운데 가장 높은 라파스를 떠나 티티카카 여행의 기점인 코파카바나로 향했다. 해발 3000~4000m에 이르는 고원을 버스로 4시간 정도 달려야 하는 거리다. 깊은 협곡에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라파스 시내를 벗어나 고원의 들판으로 접어들자 풍경이 달라지면서 시야가 확 트였다.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과 점점이 떠 있는 하얀 구름, 멀리 만년설을 뒤집어쓴 채 병풍처럼 서 있는 설산, 한참 가을걷이가 진행 중인 들녘, 들판의 소와 양, 드믄드믄 자란 나무 등 모든 사물이 손에 잡힐 듯이 펼쳐졌다. 어쩌면 평범한 풍경일 수도 있지만, 고원지대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모든 사물이 선명하고 또렷하게 본래의 색깔을 드러냈다.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티티카카 호수에 접한 코파카바나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다본 풍경. 고원에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자연과 모든 사물이 청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반투명의 얇은 막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 숨이 막힐 듯했다. 색다른 느낌의 풍경을 보면서 지금까지 한국에서 보았던 자연이나 사물의 색깔은 진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한국에선 거의 공해나 먼지, 수분 같은 이물질이 시야를 가린다. 그런데도 그걸 원래 색깔로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보니 한국에서의 색깔은 ‘가짜’였다.

이런 느낌은 티티카카 여행을 마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라파스에서 2시간 정도 달리자 티티카카 호수가 나타났다. 코파카바나는 호수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버스와 승객이 보트를 타고 건너야 했다. 건너편에서 다시 승객을 태운 버스가 이번엔 티티카카 호수를 끼고 1시간 정도 달려 코파카바나에 도착했다. 창밖으로 쪽빛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져 눈을 뗄 수 없었다.

코파카바나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적막한 오지였지만, 2000년대 이후 여행자가 늘어나면서 변화하고 있는 곳이다. 기념품점엔 빨강과 파랑ㆍ노랑 등 원색을 선명하게 드러낸 안데스 고유의 의류와 머플러, 모자 등이 즐비했다. 도회지 사람에겐 낯선 디자인이지만, 원색의 자연을 늘 접해온 이들에겐 자연스러울 듯했다. 안데스는 색깔의 개념이 다른 곳이었다.

▶안데스의 신비를 간직한 ‘태양의 섬’=다음날 티티카카 호에서 가장 큰 섬인 ‘태양의 섬(Isla del Sol)’으로 향했다. 보트로 2시간 정도 걸리는데, 미국과 유럽ㆍ호주ㆍ브라질 등 30여명의 다국적 여행자와 같은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렀다.

 
‘태양의 섬’에서 전통의상을 입고 머리를 땋아 길게늘어뜨린 여성이 마을에서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다. 남성은 서구화한 복장을 입지만, 여성은 전통의상을 고수한다.

티티카카는 길이가 190㎞, 폭이 80㎞로 남미에서 가장 크며 해발고도가 3810m로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호수 중 하나다. 면적이 8372㎢로 한국의 전라북도가 쏙 들어가고도 남는다. 이런 고원에 망망대해 같은 호수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 호수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은 ‘태양의 섬’과 페루 쪽의 ‘우로스 섬’이다. 우로스는 섬은 물론 집조차도 모두 갈대로 만들어져 물 위에 떠있는 신비한 섬이며, 태양의 섬은 원주민 마을과 문화가 보존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 곳을 놓고 고민하다 관광지로 탈색된 우로스 대신 원주민의 실제 생활모습을 볼 수 있는 태양의 섬을 선택했다.

태양의 섬은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는 곳이다. 특히 잉카인에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잉카 신화에 따르면 우주가 형성되면서 티티카카 호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태양의 신’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만큼 성스러운 곳이다.

태양의 섬 북쪽 선착장에 내리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 이 섬의 유물을 전시한 작은 박물관이 있었고, 기념품점과 음식점ㆍ카페도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모든 시설을 주민 공동체가 관리해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마을은 한국의 1970년대 섬마을과 유사했다. 주택과 담은 주로 흙으로 지어져 있고, 햇살이 잘 드는 곳에선 안데스 전통의상을 입은 아낙네가 콩 타작을 하고 있었다. 가축을 돌보거나 집을 손질하다가 관광객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언덕으로 올라가자 티티카카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끝으로 안데스 영봉이 아스라히 펼쳐져 있고, 산 정상과 등성이로 트레킹 코스가 만들어져 있다. 섬엔 경작할 만한 평지가 거의 없어 비탈에 계단식 경작지를 촘촘하게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섬 곳곳엔 잉카 유적이 작렬하는 태양 아래 정지된 시계처럼 서 있었다. 이 섬에 주민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3000년이지만, 남아 있는 유적은 대부분 잉카 전성기이자 스페인 침략 직전인 15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조금만 빨리 걸어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고지대여서 천천히 걸어야 했다. 신화가 숨쉬는 태양의 섬 트레킹은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곳이기도 했다.

▶비우고 떠난 여행, 행복으로 채운 여정=트레킹 코스를 따라 섬을 관통해 반대편 남쪽 마을로 내려오니 마침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스페인 성인인 성 아우구스토 축제라고 했다. 흥겨운 연주에 맞추어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과 정장 차림의 남성이 줄을 맞춰 군무를 추고 있었다. 참여 인원이 100명이 넘었다. 작은 섬으로선 대형 축제였다. 주민도 나와 흥미롭게 지켜보거나 맥주를 마시며 축제를 즐겼다. 태양의 섬에서 우연히 만난 인상적인 축제였다. 공동체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남쪽 항구로 내려오니 태양신의 아들이자 잉카제국을 건설한 전설적인 왕인 망코 카팍의 동상이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붉은 피부와 단단한 체구에 태양을 담은 지휘봉을 번쩍 치켜든 망코 카팍이 잉카의 시원인 이 아름다운 호수와 태양의 섬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잉카는 희미한 신화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아직 티티카카 호를 감싸고 있었다.

태양의 섬에서 코파카바나 항구로 돌아오는데 태양이 호수 저편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다시 환상적인 풍경에 빠지면서 왠지 모를 충만감이 몰려왔다. 지금의 이 충만한 느낌이 그동안 겪어왔던 힘겨움을 다 해소해주는 것 같았다.

사실 가족 세계일주를 처음 생각할 때만 해도 고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직장문제, 아이들 학업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밤잠 설치기를 거듭했다. 하지만 ‘사고를 치기로’ 작정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고 앞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실의 끈을 내려놓으니 새로운 길이 보였다. 여행은 그 현실이 주는 힘겨움을 비우고 새 희망을 채우는 작업이다. 지금의 이 충만감과 행복감이 그 비움의 대가일 것이다. 이제 행복의 바이러스를 가족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 내가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할 것 아닌가. 지금의 충만감이 일시적인 것일지는 모르지만, 그 새로운 맛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했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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