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옛 로마를 반추한 벤추라의 매혹적인 사진연작, 서울에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한 군인이 로마에 당도했다. 그런데 그는 열흘째 되는 날 사라졌다. 어떤 이는 그가 카페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공원을 오가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는 더이상 이 도시에 없다.(A Zuavo arrives in Rome to visit the city.On the tenth day he disappears. Someone sees him entering a cafe. Others see him going into a park. Nobody, however, hears any more of him.)”

디오라마(Diorama) 기법으로 작업하는 이탈리아의 사진작가 파올로 벤추라(Paolo Ventura)의 신작 ‘Lo Zuavo Scomparso(Lost in Rome)’는 이같은 단순한 얼개에서 출발했다.

작가는 이야기의 얼개를 짠 다음, 그 스토리가 펼쳐질 무대를 마치 영화세트처럼 일일이 손으로 만든다. 목재로 건물도 만들고, 조각상이며 테이블도 제작한다. 벽에 부착되는 낡은 포스터라든가, 푸른 이끼가 낀 도시의 오래 된 돌바닥까지 만든다. 공통점은 이들 배경을 실제 사이즈 보다 축소해 작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곤 그 무대에, 작가 자신이 인물로 등장해 사진을 찍는다. 이같은 기법은 현대미술계에서, 또 사진계에서조차 흔치않은 기법이다. 파올로 벤추라는 독특하면서도 섬세한 아나로그적 작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를 부드럽게 오가며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과연 진실인지 되묻게 한다. 아울러 현실 저 너머의 세계를 조용히 돌아보게 만든다.


파올로 벤추라가 창조한 무대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듯하지만, 철저히 자신만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그는 끊임없는 상상과 스케치를 통해 정교한 디오라마를 제작한다. 그리곤 여러차례의 폴라로이드 촬영을 거치며 화각및 구도를 결정한다. 그리곤 최종촬영에 돌입한다. 각 장면에 등장하는 배경과 소품은 실제의 시공간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해도 좋으리만치 섬세하고 정교하다.

모두 10점으로 이뤄진 파올로 벤추라의 ‘Lo Zuavo Scomparso(Lost in Rome)’ 중 한 점인 ‘February 07’을 보자. 작은 등(燈)이 켜진 낡은 카페 옆을, 한 사내가 지나고 있다. 양복차림의 사내는 난데없이 사다리를 매고 있다. 저 멀리 그림의 소실점 쪽에는 코트를 입은 신사가 화면 밖을 응시 중이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곧 비라도 쏟아질 것같다. 스산하다.

도무지 알쏭달쏭한 한 이 작품에선 1930~40년대 로마의 뒷골목 정서가 느껴진다. 을씨년스런 공기와 낡디 낡은 카페, 낮으막한 건물에서 지금은 사라진 로마의 옛 정취가 감지된다.


이번 작업은 벤추라가 로마 시(市)로부터 작업을 제의받아 만든 것이다. 로마 시로부터 커미션 웍을 제안받았을 때 벤추라는 ‘작업의 주제, 방향에 있어 작가에게 전권을 줄 것’을 요구했고, 시 측이 흔쾌히 응해 이번 작업이 탄생했다. 벤추라는 이에 지금까지 해왔던 연작과 같은 맥락의 작업을 완성해냈다. 그는 이제는 아련한 흔적만 남은 로마의 정취를, 사라진 옛 군인의 열흘간의 행적을 통해 흥미롭게 재현했다.

작품에서 로마의 특징적 요소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현실과 가상을 혼재시키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모든 장면은 잔뜩 구름이 낀 공간에서 펼쳐진다. 결국 시간대를 가늠키 어려운 공간이 됐다. 작가는 주인공이자 관찰자로 등장하는데 상황을 구구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등장인물의 복장을 통해서 사건의 시점과 무대가 근대 이탈리아임이 짐작될 뿐이다.

작품의 타이틀인 ‘Lo Zuavo Scomparso(Lost in Rome)’는 ‘(로마에서) 사라진 군인’을 뜻한다. Zuavo는 원래 아프리카에 주둔했던 프랑스의 경보병을 일컫는 용어다. 그러나 군인들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서양의 근대사에 수없이 등장하는 Zuavo는 이들의 특이한 복장, 즉 장식성이 강조된 붉은 의복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로마’하면 떠오르는 콜로세움이며 바티칸 성당같은 도시의 랜드마크를 배제한채, 엉뚱하게도 군인(Zuavo)을 등장시킴으로써 관람자에게 시간이 정지된 생경한 로마를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하늘은 잔뜩 흐려 시간대 또한 파악키 어렵다. 을씨년스런 공간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Zuavo를 찾아나선 파올로 벤추라의 이번 작업은 독특한 내러티브와 색감, 복고적 서정이 더없이 매혹적이다. 


그의 이번 연작은 지난해 9월 이탈리아 로마의 현대미술관인 MACRO(Museo di Arte Contemporanea di Roma)에서 처음으로 공개돼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한국에서는 서울 서초동의 갤러리바톤(대표 전용진)이 파올로 벤추라의 신작 ‘Lo Zuavo Scomparso(Lost in Rome)’를 아시아 최초로 공개하는 전시를 오는 3월 16일까지 개최한다.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사진작가 파올로 벤추라의 아시아지역 전속권을 확보한 갤러리바톤은 지난 2011년 개관당시 국내 최초로 벤추라 작품전을 개최한바 있다. 당시 소개됐던 ‘Automaton(자동기계)’과 ‘Winter Stories’는 국내 미술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잔잔한 반향을 일으킨바 있다. 전용진 대표는 “파올로는 초기 시리즈인 ‘Winter Stories’로부터 천착한 그만의 독특한 제작 방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왔다. 마치 영화 감독이 자신의 상상과 스크립트에서 끄집어낸 스토리를 결합해 특정한 주제와 공간, 그리고 이야기들을 한 씬 한 씬 창조하듯이, 파올로는 자기의 조국인 이탈리아의 일상 또는 아련한 과거의 추억들을 담담히 그려왔다”고 전했다.

지난 2011년 세계적 권위의 현대미술제인 베니스비엔날레의 이탈리아 국가관 대표작가로 선정돼 작품을 선보인바 있는 파올로 벤추라는 “예술적 표현방식으로써 내가 사진을 선호하는 이유는 어떤 사진이 의도적으로 정교하게 조작 촬영되었을 개연성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진에서 보이는대로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창작물인 영화를 보러가서 울고, 흥분하고, 감동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들이 사진으로 본 것을 믿고자 한다”고 밝혔다. 무료관람. 02-597-5701

[사진제공=갤러리바톤]

yr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