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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로 다시 태어난 우리 마을..자꾸 거닐고싶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쪽빛 바다가 넘실대는 제주도의 서귀포는 이 땅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서귀포 구(舊)도심 소암로 29번지에는 오랫동안 방치됐던 폐가가 있었다. 주변에 쓰레기만 잔뜩 쌓여 볼썽사나웠던 이 폐가가 최근 제주 미술가에 의해 멋진 예술체험장이 됐다. 

젊은 작가 부지현은 폐가를 말끔히 손본 뒤, 공간 전체를 어둡게 색칠하고 바닥에는 커다란 흑경을 깔았다. 그리곤 어부들이 쓰던 폐집어등 100여개를 공중에 매달았다. 폐집어등에는 LED 조명을 부착해 3~4분 간격으로 어두운 폐가가 환하게 밝았다, 어두워졌다 하도록 했다. 미술관 또는 비엔날레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설치미술이 서귀포시 도심에 등장한 것은 ‘마을미술프로젝트’ 때문이다.

▶낙후된 지역이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지리·역사·생태·문화적 가치가 있는 마을을 공공미술을 통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이 프로젝트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마을미술프로젝트 추진위원회(위원장 김춘옥)가 주관한다.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5년째에 접어들며 북으로는 강원 철원에서부터 중부 및 남부 지방 곳곳을 거쳐 남쪽으론 부산과 서귀포까지 전국 57곳 마을에서 시행됐다. 그리고 올해도 전국 11개 지역에서 프로젝트가 이어진다.

지난 2009년부터 매년 사업지를 선정해온 마을미술프로젝트는 지난해에는 서울 성북·강서구, 경기 수원시, 전북 남원시, 전남 화순군 등 전국 11곳에서 진행됐다. 그중에서도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과 제주 서귀포 ‘유토피아로’(路)는 공공미술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천마산 아래 반달고개를 따라 손바닥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감천문화마을은 6·25전쟁 후 피란민의 집단거주지였다. 따라서 우중충한 잿빛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 낙후된 마을은 2009년 예술을 만나 빠르게 변모해갔다. 마을 곳곳에 아름다운 벽화와 조형물이 자리잡았으며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 ‘산복도로 르네상스’ 등이 시행되며 전혀 다른 도시로 탈바꿈했다. ‘한국의 마추픽추’ ‘부산의 정겨운 꿈꾸는 마을’로 소문이 나며 이 곳을 찾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낡은 옛 목욕탕은 마을 주민을 위한 ‘감내어울터’로 변신했다. 이 곳에서는 도자기 제작 체험, 미술전시 등 각종 문화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곳곳에 아트카페와 갤러리도 생겨나면서 일본 유엔해비타트 후쿠오카본부에서 선정한 ‘아시아도시경관상’도 수상했다. 이에 고무된 마을 주민들은 화사한 색으로 집을 칠하며 호응하고 있다. 관광객이 늘자 골목길엔 쓰레기가 자취를 감췄다. 부산에서도 가장 낙후됐던 지역이 예술을 만나 되살아난 것이다.

제주 서귀포는 ‘유토피아로(遊土彼我路)’라는 주제로 ‘행복’을 추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유토피아로는 숲·집·길·바다 등 4개의 소주제로 나눠진 구역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숲과 집을 오가고, 바다를 음미하도록 한 4.3㎞의 길이다. 제주에서 신혼여행을 즐겼던 커플들의 옛 사진을 모아, 지금은 문을 닫은 사진관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안성희 작가의 ‘행복한 사진관’ 등 무릎을 치게 하는 작업 등 모두 40점이 넘는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

작업들은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과 삶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작가 박건주의 ‘흰 파도 검은 바위’는 제주의 검은 현무암과 색유리로 제주 바다를 장중하게 표현한 70m 길이의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벽화다. 평안도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서귀포로 피란온 국민화가 이중섭(1916~56)이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을 그리는 장면을 형상화한 대형 조각 등 제주만의 스토리를 살린 작업들도 눈길을 끈다.
또 ‘고추 먹고 맴맴’이란 유명 동요의 발상지인 충북 음성군에는 동요를 모티프로 한 미술작업이 시행됐고, 전남 화순군 남산 토성 아래 자리잡은 성안마을에는 성(城)을 테마로 한 작업들이 자리잡았다.

타 지역인들은 미처 몰랐던 각종 이야기들이 벽화며 설치미술, 조각 등으로 화려하게 꽃피우며 여러 마을들이 그야말로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되고 있다. 이처럼 지역민의 생활공간을 공공미술로 가꾸는 마을미술 프로젝트는 일차적으로는 낙후된 문화 소외지역에 예술의 향기를 불어넣어 문화 향수권을 신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 청년작가들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고, 버려진 마을을 소생ㆍ치유하는 목적도 있다. 또 작가와 지역 주민들이 교감을 통해 공공미술의 의미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추진위 김해곤 총감독은 “부산 사하구의 감천문화마을, 경북 영천의 별별 미술마을, 서귀포의 ‘유토피아로’를 잇는 ‘아트투어’를 추진 중”이라며 “마을미술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사업의 성공사례가 올해부터 초ㆍ중등 교과서에 실렸다”고 귀뜸했다.


▶공공미술로서 과제 또한 많아=마을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쇠락했던 지역들이 활기를 띠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현대미술과 전통의 은근한 조화, 지역주민과 미술의 소통은 마을을 찾는 이들에게도 예술적 포만감을 안겨준다. 우리가 늘 외치는 삶의 질도 높아진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미흡한 측면도 드러나고 있다. 지역별로 고만고만한 벽화들과 다소 유치한 조형물이 충분한 논의와 검토없이 양산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에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뮌스터의 사례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살리기 위해 뮌스터 시는 1977년부터 10년에 한 차례씩 세계 정상의 조각가를 초청해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를 열고 있다. 그 결과 전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멋진 공공조각을 보유한 도시로 발돋움했다. 지난 2007년 뮌스터 프로젝트에는 전 세계에서 65만명이 다녀갔을 정도다. 이는 장소의 특수성을 살린 예술을 매우 신중하게 엄선해 선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술과 도시가 상호밀접한 연관성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보다 긴 호흡으로 접근하는 게 필요하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은 장기적 관점에서는 ‘또 다른 공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청년작가들에게 일할 기회를 줌으로써 고용을 창출한다는 취지 때문에 적은 예산을 쪼개다 보니 개개 작품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 작품에 따라서는 3년, 5년식으로 한시적으로 설치됐다가 사라지는 ‘일몰 기간’이 있는 것들도 있어, 영구적 설치미술과 같은 잣대로 접근해선 곤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귀포 지역의 프로젝트를 돌아본 유우숙 재독 미술사가는 “간혹 인상적인 작업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주제및 작가 선정이며 작품 제작의 호흡이 짧은 듯해 아쉬웠다. 보다 심도 있고 전문화된 프로젝트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진제공=마을미술 프로젝트 추진위원회

이영란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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