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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 <44> 자유의 종소리가 국민을 깨우는 듯…미국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이해준 문화부장]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

1960년대 참여문학의 기수였던 김수영 시인이 4ㆍ19혁명 직후 쓴 ‘푸른 하늘을’이라는 시의 일부다. 서슬퍼런 군사독재가 기세를 떨치던 1980년대 학창시절 금기시됐던 이 시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새롭다. 이 시의 키워드는 자유와 혁명과 피다. 민주화가 이뤄진 지금까지도 뇌 회로의 한 귀퉁이에서 ‘불온한 언어’라는 신호를 보내는 낱말이다.

여행기에 이런 ‘심각한’ 시를 먼저 꺼내는 것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필라델피아를 돌아보면서 이 시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과 여건이 전혀 다른 미국에서 50년 전 한국 시인의 시를 새롭게 느낀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미국혁명의 결실을 맺은 역사의 현장=필라델피아는 미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 즉 미국혁명(American Revolution) 과정에서 보스턴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한 도시다. 보스턴은 독립전쟁의 발화점이 된 ‘차 사건(Boston Tea Party)’과 미국과 영국과의 첫 독립전쟁이 벌어진 곳인 반면, 필라델피아는 그 이후 독립전쟁을 지휘하고,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궁극적으로 미국의 새 이념을 집약한 헌법을 채택해 초대 정부를 출범시킨 곳이다. 보스턴이 미국혁명의 씨앗을 뿌렸다면, 필라델피아는 싹을 튀우고, 가꾸고, 키워서, 마침내 결실을 맺도록 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도시로, 미국 여행 시 필수코스다.
 
필라델피아의 독립역사공원 방문자센터. 자유와 독립을 향한 미국혁명의 역사를 잘 정리해놓아 이해에 도움이 되는 곳이다.

필라델피아는 인구가 150만명을 넘는 미국 내 5대 도시로 규모가 매우 크지만, 미국혁명과 관련한 유적지는 중심부의 미국독립역사공원에 밀집돼 있다. 미국인에게 독립과 관련한 역사를 교육하는 현장으로, 이를 돌아보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들지 않는다. 방학을 맞아 뉴저지의 한 기업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인 조카와 만나 아주 간단히 돌아보았지만, 울림이 너무 큰 곳이었다.

이 역사공원엔 방문자센터와 독립투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인디펜던스홀, 헌법센터, 대통령의 집 등이 들어서 있다. 먼저 방문자센터를 돌아보았다. 미국혁명 역사와 주요 인물을 설명해 놓아 대략적인 이해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어 역사공원 중앙에 있는 인디펜던스홀, 말하자면 독립기념관으로 향했다. 1753년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식민지 정부청사로 사용되다 나중에 지방의회 건물로 바뀌면서 미국혁명의 심장부 역할을 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보스턴 차 사건과 렉싱턴 전투로 독립전쟁의 기운이 무르익던 1775년 13개 식민지의 대표가 인디펜던스홀에 모여 대륙의회를 열었다. 미 의회의 효시이기도 한 이 대륙의회는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독립군(대륙군)을 창설해 독립전쟁을 지원하고, 1776년엔 독립을 선언했다. 1783년 파리조약으로 독립이 승인될 때까지의 전 과정을 이끌었다. 1787년 삼권분립과 민주공화제를 기초로 한 미국 헌법을 만들고, 1789년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하는 미국 초대 정부를 출범시킨 장소이기도 하다.

마침 화창한 주말을 맞아 많은 시민이 방문자센터와 인디펜던스홀을 방문해 독립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었다. 조카는 여러 번 와서 그런지 무덤덤했지만 자유와 독립,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현장, 미국혁명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인디펜던스홀. 1770년대 독립선언, 헌법제정 및 공포 등 미국 건국과 관련한 핵심적인 일이 펼쳐진 역사적 장소다.

▶자유의 종소리 아직도 울리는 듯=인디펜더스홀 건너편엔 자유의 종(Liberty Bell)이 별도로 보관돼 있다. 원래 인디펜던스홀의 꼭대기 탑에 있었던 종을 전시해 놓은 것이다. 미국혁명 당시 회의를 소집하거나 주요한 시민집회를 열 때 타종했던 종이다. 특히 독립선언문 낭독과 초대정부 출범 등 주요 행사 때마다 울렸던 종으로,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독립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래 필라델피아 지방의회가 의사당에 설치하기 위해 영국에 의뢰해 제작했으나, 처음 종을 칠 때 갈라졌다고 한다. 필라델피아에서 다시 주조했으나 실패해 지금도 종의 균열이 선명하게 남아 230여년 전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듯했다. 이곳에도 많은 미국인이 몰려 종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등 부산했다. 마치 자유의 종이 지금도 시민의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일깨우는 듯했다.


지금이야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지만, 당시 혁명의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미국이 맞선 영국은 아프리카 남아공에서 인도, 미국까지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초강대국이었다. 독립전쟁을 이끈 조지 워싱턴 장군은 영국군은 물론 부족한 물자와 식량, 자금과도 싸워야 했다. 농민복장 차림의 ‘민병대’에 불과했던 병사를 규율이 잡힌 군대로 키우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고난을 극복하고 전쟁을 치렀기에 독립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며, 그렇기에 든든한 건국의 토대가 됐던 것이다.

독립역사공원 이곳저곳을 돌다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됐다. 아무리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식후경이라야 여행의 즐거움이 살아나는 법. 가벼운 마음으로 필라델피아의 명물인 치즈스테이크를 맛보기 위해 유명한 ‘제노스테이크(Geno’s Steaks)’ 레스토랑을 찾았다. 1966년 설립된 레스토랑으로 보스턴이 랍스터로 유명하다면 필라델피아는 스테이크를 빼놓을 수 없다.

제노스테이크엔 역사공원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한국의 유명한 맛집의 점심식사 때처럼 종업원도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한참 기다린 끝에 바게트빵에 쇠고기 스테이크와 치즈를 듬뿍 넣은 샌드위치를 받을 수 있었다. 크기가 거의 어른 팔뚝만해서 콜라와 함께 하나만 먹어도 배가 든든했다. 유명한 집이라지만, 이방인의 입엔 그저그런 바게트 스테이크였다.

배를 채우고 필라델피아 구시가지와 중심부를 차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사실상 이것으로 필라델피아 여행은 끝이 났다. 너무나 짧은 여정이었지만, 필라델피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필라델피아를 떠나 대서양 연안의 해수욕장인 애쉬버리 공원을 거쳐 조카가 사는 뉴저지의 전원마을로 향하면서도 자유의 종과 독립군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자유와 독립, 민주주의의 상징인 자유의 종. 영국에서 제작돼 들여와 처음 타종할 때 균열이 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공 경험의 공유는 미래 개척의 힘=보스턴과 필라델피아의 미국혁명 유적지는 미국의 뿌리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 비추어 보면 미국은 유럽 이민자가 세운 신생국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다인종ㆍ다민족ㆍ다문화로 이루어진 국가다.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피를 흘린 경험이 국가통합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

이는 미국에 앞서 돌아본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와 극명하게 대조됐다. 아르헨티나 역시 이민자가 세운 국가로, 180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을 능가했다. 하지만 끝없는 정치불안과 경제난으로 퇴행을 거듭해 지금은 미국과 비교가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국민을 하나로 묶을 공통의 가치, 국민적 영웅, 성공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정체성이 결여돼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독립은 미국보다 20여년 후인 1810년 이뤄졌지만 스스로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남미를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권력 공백상태가 생기자 남미의 지배세력이 기득권 보호를 위해 독립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미국과 같은 정치ㆍ사회적 혁명이 수반되지 않고 기존 시스템이 대부분 그대로 유지됐다. 북미에선 ‘미국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긴 반면, 남미엔 아직도 콜로니스트(colonist)란 의식이 남아 있어 사회통합에 애를 먹고 있다.
 
필라델피아 역사공원 거리.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자동차와 함께 서 있는 마차가 230여년 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을 여행하면서 한국의 상황이 머리 한 쪽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국에 비추어 보면 한국은 절반의 성공을 이룬 나라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한강의 기적’, 4ㆍ19혁명과 5ㆍ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등 민주화 투쟁의 경험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분열된 것이 한국의 모습이자 독특한 에너지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끝없는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며 사회비용을 초래하고 있다. 여기에 남북 분단까지 감안하면 너무 슬프다.

어쩌면 50년 전 김수영 시인의 노래와 염원은 아직도 우리의 현실적 과제를 보여주는 듯했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이나 건물을 찾으려는 여행자에게는 좀 지루한 여행지가 될 수 있지만, 필라델피아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반추하게 만든 뜻깊은 곳이었다. 장기여행을 한다면 이런 진지한 사색도 곁들여야 여행이 풍성해지는 법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필라델피아를 떠났다.

hjlee@heraldcorp.com

필라델피아의 명물인 치즈스테이크 전문점인 ‘제노 스테이크’ 레스토랑.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헤럴드경제 문화부장은 2011년 10월 12일 한국을 출발, 아시아에서 유럽~남미~북미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펼쳤습니다. 전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중학생 조카 등 5명이 시작한 이번 여행을 통해 이들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각자의 삶과 우리 사회의 새 희망을 찾았습니다. 때로는 우왕좌왕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진한 가족애도 쌓았습니다. 삶의 목표를 확인한 사람이 하나씩 귀국해 마지막 여정에선 아빠 1명만 남게 되는 이들의 생생한 여행 이야기는 인터넷 카페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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