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이영란 선임기자의 art&아트> 명작이 된 글씨, 디지털시대 가치를 묻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내달 5일까지‘ 그리기와 쓰기의 접점에서’展
리히터·타피에스·톰블리·드 쿠닝…
美·유럽 쓰기예술 거장 작품 68점
아랍권·한·중·일 작가 11점도 동참
몸과 기호 등 5개 작은주제로 나눠 전시




아, 예쁜 편지지에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울여가며 손글씨를 써본 게 대체 언제던가. 글씨가 마음에 안 들어 밤을 하얗게 새우며 쓰고 또 썼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e-메일과 SNS가 확산되면서 손글씨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세기를 넘어 이어져 온 ‘서화일치(書畵一致)’의 도도한 전통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걸까.     

컴퓨터 자판이 손글씨를 대신하는 디지털 시대에 손글씨의 가치를 되묻는 전시가 개막됐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은 개관 25주년을 맞아 서예박물관에서 ‘그리기와 쓰기의 접점에서’전을 마련했다. ‘그리기’와 ‘쓰기’의 원천을 탐구하고 쓰기 예술의 미래를 조망한 이 현대미술전에는 한ㆍ중ㆍ일 3국 작가는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의 추상 거장들이 망라됐다. 또 한국에선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아랍문화권 작가들도 소개된다.

이처럼 다양한 권역의 작품이 집결된 것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소재한 리튼아트파운데이션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ㆍ독(韓獨)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특별전에 리튼재단은 골갱이에 해당되는 주요 작품 68점을 대여했고, 여기에 예술의전당 전시팀이 11점을 추가했다. 제약기업 오너인 크리스찬 베링거 회장 등의 주도로 2011년 출범한 리튼재단은 손글씨의 문화적ㆍ교육적 가치에 주목하고 각종 사업을 펼쳐왔다. 또 수준 높은 컬렉션을 통해 쓰기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아랍권을 대표하는 이란 출신 작가 시린 네샤트(56)의 작품‘ Nida’. 아랍의 평범한 젊은이를 촬영한 후 그 얼굴과 몸에 끊임없이 글씨를 써넣은 연작 중 하나다. 잉크로 쓴 글귀는 애국을 강조한 이란 고전의 내용이다.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이에 따라 작가들의 면면은 자못 화려하다.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 영향력을 지닌 독일의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비롯해 프란츠 클라인(미국), 안토니 타피에스(스페인), 사이 톰블리(미국), 윌럼 드쿠닝(미국) 등 서구 거장들이 망라됐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겐 생소한 아랍권 작가들과 한국 중국 일본 작가 등 총 59명의 작품 79점이 내걸렸으며, 이 중 점당 보험평가액이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6점이나 포함됐다. 출품작들은 현대미술 속에 꿈틀대며 살아 있는 캘리그래피(서예)의 미학과 정신을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은근하게 보여준다.

전시는 ‘몸과 기호’ ‘그려진 문자들’ ‘모방과 창조’ ‘상상의 문자-풍경’ ‘상상의 문자-텍스트’ 등 5개 소주제로 짜였다. 첫 섹션인 ‘몸과 기호’에는 수묵으로 사람 ‘인(人)’자를 써내려가며 거대한 인간탑을 만든 서세옥의 회화를 중심으로, 좌우 측에 칼 오토 괴츠, 모하메드 에사의 작품이 내걸렸다. 또 언어 이전의 원초적 표현과 소통의 에너지를 격렬하게 담은 드쿠닝과 리히터의 작품도 이 섹션에 출품됐다.  

에두아르도 칠리다의 ‘무제’. 서양 작가의 작품이지만 검은 필선과 흰 여백이 동양 서예와 맥을 같이한다.

‘상상의 문자-풍경’에는 자연을 필획을 툭툭 쳐내듯 표현한 이우환의 ‘동풍’과 사이 톰블리의 ‘룩소르-겨울여행’이 오붓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강소의 작품 ‘강에서’(리튼재단 소장) 또한 사이 톰블리의 ‘무제’와 짝을 이루며 동서양 필획에 뿌리를 둔 현대추상의 개성 충만한 세계를 보여준다. 이 밖에 한스 아르퉁, 아돌프 고틀리브 등 추상미술 거장과 아랍문화권 작가 작품도 다양하게 나왔다. 이응로 남관 김창열 이정웅 손동현 등 우리 작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김애령 예술의전당 전시감독은 “서양에서 캘리그래피는 공예의 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자기수련과 정신성에 기반을 둔 동양서예에 매료된 조르주 마티외, 마크 토비 같은 작가들이 이를 탐구하면서 전후(戰後) 추상회화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이후 현대의 많은 작가는 ‘쓰기 예술’을 기반으로 상상의 문자를 발명하거나 내면의 독백을 낙서처럼 끼적이고 화폭을 한 장의 편지나 책장처럼 만들면서 자신들의 심상을 다채롭게 표현하고 있다. 오는 5월 5일까지. 일반 5000원. (02)580-1300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