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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47>30시간 암트랙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미국 대륙횡단(2)
[플래그스태프(애리조나)=이해준 문화부장]전미(全美)철도인 암트랙(Amtrak)을 타고 대륙을 횡단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이 뛰고 흥분되는 일이다. 사실 그랬다. 워싱턴에서 시카고까지 18시간의 1차 횡단여정이 ‘맛보기’였다면, 시카고에서 그랜드캐년과 가까운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까지 30시간에 걸친 2차 여정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환상적이고 황홀한 경험이었다.

육중한 기차는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중부 대평원과 로키산맥~콜로라도 고원의 산악지대, 뉴멕시코의 거칠고 황량한 벌판을 지났다. 해가 지는 것을 두 차례 보며 멋진 석양에 넋을 빼았겼고, 평원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맞았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묘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어느 여행자가 말했듯이 낯선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이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륙횡단 열차는 다양한 사람들이 긴 여정을 함께 하는 하나의 작은 세계였고, 우주였다. 그 속에서 여행의 고독과 삶의 희노애락을 나누며 서로 마음을 열었다. 이를 통해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고 새로운 힘을 얻는 과정이었다.

▶30시간에 걸친 대륙횡단 열차=암트랙은 미 내륙교통의 요지인 시카고 유니온역을 오후 3시에 출발했다. 서부 로스엔젤레스(LA)까지 3645km를 연결하는 ‘사우스웨스트 취프(Southwest Chief)’ 노선으로, 플래그스태프까지는 2734km에 달한다. 시카고에서부터 20시간 동안은 중부 대평원을 달리며, 이후 약 10시간 동안 로키산맥과 콜로라도 고원의 산악 및 황무지를 통과한다.

시카고 교외의 주택가를 지나자 본격적인 평원이 펼쳐졌다. 옥수수를 주로 재배하는 농장이 몇 시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3시간 정도 지나자 미 중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미시시피 강이 나타났다. 상류임에도 바다처럼 넓은 엄청난 강이다. 일리노이와 아이오와, 미주리, 캔자스 등 세계 최대 농경지역인 이곳 대평원의 젖줄 역할을 하는 강이다.

평원을 5시간 가까이 달리자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길게 석양이 펼쳐졌다. 장관이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이 드넓은 지평선에 비치는 붉은 노을 속으로 기차가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미국 대륙횡단 열차인 암트랙이 콜로라도주 라훈타 역에서 승객들에게 휴식시간을 주고 있다. 열차는 2층으로 구성돼 1층엔 스낵코너와 침대칸이 있고, 2층에 일반 객실이 있다.


의자를 뒤로 최대한 눕히기도 하고, 의자에 누워 꼬부랑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아직도 평원이다. 밤새 미주리주와 캔자스주를 통과했지만 경치는 비슷하다. 다만 일리노이와 미주리에선 촉촉하던 기후가 건조해진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듬성듬성 관목만 자라는 거친 황무지도 나타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설치한 초대형 스프링쿨러가 많이 눈에 띄었다.

오전 6시 해가 떴다. 대지에 희뿌연 햇살을 뿌리며 솟아오르는 태양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티벳고원을 가로지르는 칭창열차나 인도와 유럽의 열차에서도 일출을 보았지만, 암트랙의 일출은 훨씬 감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여기까지 와 또다른 대륙을 횡단하는 데 대한 모종의 만족감이 작용한 듯했다.

기차에는 식당칸이 별도로 있다. 2층에는 레스토랑이, 1층에는 간식과 커피를 파는 스낵코너가 있다. 레스토랑 옆에는 의자에 앉아 창밖 경치를 감상하거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휴게실도 마련돼 있다. 기차가 2~3시간마다 한번씩 정차해 바람을 쐴 시간을 주지만, 승객들은 수시로 스낵코너와 휴게실에 들러 지루함을 달랬다. 책을 읽거나 대화를 하고, 카드놀이를 하며 여유를 즐겼다.

오전 10시 트리니다드를 지나자 산악지형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육중한 열차는 구불구불 이어진 철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철길이 얼마나 심하게 휘어져 있는지 앞쪽 열차가 창문에 보일 정도다. 콜로라도주에서 뉴멕시코주로 넘어가면서 날씨는 더욱 건조해지고, 풍경은 척박하고 황량하게 바뀌었다. 횡단열차에서 본 풍경은 단조로운 듯하면서 서서히 변화가 나타났다.
 
암트랙 대륙횡단 열차의 휴게실에서 승객들이 책을 보거나 경치를 감상하고, 대화를 나누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순박한 시골 부부와의 만남=열차에 올라 처음 만난 사람은 중노년의 모니카 아줌마와 제임스 아저씨였다. 6~7세쯤으로 보이는 손자와 함께 시카고를 여행하고, 고향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카고에서 출발할 때 모니카 아줌마가 옆자리에 앉았다. 얼굴은 6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6명의 자녀와 8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고 해 깜짝 놀랐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카고 외곽의 널찍한 정원을 지닌 주택가를 가리키며 “와, 마당이 아주 넓네요”하고 말하니 모니카 아줌마가 “이건 넓은 게 아니야”라면서 자신의 집 이야기를 했다. 큰 농장을 갖고 있는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 한쪽으로 반마일(약 800m), 다른 쪽으로는 1.5마일(약 1.4km) 이상 떨어져 있으며, 마당은 가로가 500피트(150m), 세로가 200피트(61m)나 된다고 했다. 사진을 보니 진짜 학교 운동장만했다. 한참 달려가야 하겠다고 하니 껄껄 웃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다음날 오후 4시가 넘어 앨버커키에 도착할 때까지 25시간이 넘는 여정 동안 수시로 이뤄졌다. 제임스 아저씨는 농장일을 하고, 모니카 아줌마는 초등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곳에선 대도시와 달리 10대말~20대 초반이면 결혼을 하고, 3~4명 이상의 자녀를 낳는다고 했다. 외롭지 않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 모니카는 “집안일을 하다가 필요하면 이웃에 전화를 한다”며 “그러면 이웃이 ‘OK’ 하고 차를 몰고 온다”고 했다. “아들 3명이 가까운 곳에 살고, 손주도 3명이나 있어 자주 방문하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임스 아저씨는 도시에 오면 답답하다며 농장이 좋다고 말했다.

시카고를 출발한지 26시간이 넘은 오후 4시30분 앨버커키에 도착해 그들이 내렸다. 농장까지 가려면 차로 4~5시간을 더 가야한다고 했다. 그들의 가족사진도 함께 보고, 스낵도 같이 먹으면서 가족처럼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이었다. 모니카 아줌마는 내리면서 버팔로 육포와 과자를 잔뜩 주었다. 아주 순박하고, 친절하고,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마음씨를 유지하는 시골 부부였다.


▶예술가ㆍ농업 지식인과의 대화=기차가 앨버커키를 출발하자 이번에는 50대 초반의 여성이 옆 자리에 앉았다. 앨버커키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화가로, 동양의학과 동양철학, ‘홀리스틱(Holistic)’한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고요한 분위기가 풍기는 독특한 미국인이었다. 한국에서 출발해 지구를 한바퀴 돌고 있는 여행자라고 소개하니 많은 관심을 보여, 플래그스태프에 도착할 때까지 4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예술, 여행, 인생은 물론, 한국과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소재가 종횡무진 이어졌다. 이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아는 대화에 굶주렸던 나의 말문을 트게 했고, 내가 말문을 열자 맞장구를 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신나고 즐거운 대화였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나중에는 기진맥진할 정도가 됐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이런 식이었다. 처음에 예술에서 이야기하다, 마리아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라며 고흐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내가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의 감동과 그의 불꽃같은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열정을 찾는 방법의 하나로 여행에 대해, 각자의 여행 경험으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기차는 뉴멕시코주를 관통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렸다. 2시간 정도 달려 갤럽(Gallup)이라는 작은 도시를 거쳐 애리조나주로 넘어갔다. 풍경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건조하고 황량한 들판과 산악지형이 반복해서 펼쳐졌다. 또다시 멋진 석양이 펼쳐지고 칙칙폭폭, 철커덕철커덕 황야를 질주하는 육중한 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지고, 우리는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암트랙 대륙횡단 열차의 휴게실에서 승객들이 책을 보거나 경치를 감상하고, 대화를 나누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암트랙에서 스쳐간 사람을 일일이 열거하긴 힘들지만, 잊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일리노이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테일러 씨 부부였다. 그랜드캐년을 돌아본 다음 다시 암트랙을 타고 LA로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다 역에서 만났다. 일리노이 옥수수생산자협회 부회장이기도 한 테일러 씨는, 풍채가 좋고 균형잡힌 몸매에 예의를 갖추고 품위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중년 신사였다.

그는 시카고 북서부 에스몬드에서 대대로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으며, 생산물 대부분을 일본과 한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의 언론이라고 소개하자 한국의 경제상황에서부터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유전자변형농산물(GMO)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 등에 대해 쉬지 않고 질문을 했다. 그는 매우 합리적이고 목표 의식이 분명했다. 자신의 생각을 요령 있게 펼치면서도 필요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얻으려 했다. 상대를 편안하게 하면서도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답변했다. 그가 농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미국이 각 부문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암트랙을 타고 대륙을 횡단하면서 창밖으로 본 경치가 미국의 외형이라면,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였다. 만남과 대화를 통해 미국의 속으로 여행을 한 것었다. 플래그스태프에 내릴 때 역은 어둠에 쌓여 있었고, 나는 장기 기차여행의 피로에 싸여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환희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과의 만남이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hjlee@heraldcorp.com

암트랙이 중부 대평원을 지나 로키산맥으로 서서히 올라가면서 급하게 휘어진 철길을 천천히 운행하고 있다. 열차 중간의 창문으로 앞 부분이 보인다.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헤럴드경제 문화부장은 2011년 10월12일 한국을 출발, 아시아에서 유럽~남미~북미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펼쳤습니다. 전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중학생 조카 등 5명이 시작한 이번 여행을 통해 이들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각자의 삶과 우리 사회의 새 희망을 찾았습니다. 때로는 우왕좌왕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진한 가족애도 쌓았습니다. 삶의 목표를 확인한 사람이 하나씩 귀국해 마지막 여정에선 아빠 1명만 남게 되는 이들의 생생한 여행 이야기는 인터넷 카페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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