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테마있는 명소] 공주 무령왕릉ㆍ송산리고분군--가장 핸섬한 ‘백제의 남자’
 [헤럴드경제= 공주] 1500년 전 그는 최고의 ‘미스터 백제’였다. 훤칠한 키에 참 잘 생긴 남자였다.

“키가 8척이나 되고 눈썹과 눈은 그림 같았다.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해 민심이 그를 따랐다 (身長八尺 眉目如畵 仁慈寬厚 民心歸附)”

삼국사기는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왕에 대해 이렇게 인물묘사 하고 있다.

그럼 그렇게 생긴 사람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모습 볼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데 볼 수 있다. 물론 동상이다. 이 동상이 그저 짐작으로 만들어진게 아니다.

무령왕의 동상, 그 탄생 과정도 아주 재밌다. 무령왕과 같은 지역 공주 출신 아주 잘 생긴 50~60대 남성 10명을 뽑아 얼굴 사진을 찍었고, 이 10명의 얼굴을 합성해 나온 모습을 반영해 1500년 전 무령왕의 얼굴로 묘사했다. 갸름한 얼굴에 성군(聖君)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잘 생긴 무령왕의 모습. 역사의 기록에도 최고의 꽃미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제 후손들은 무령왕의 얼굴을 그렇게 믿기로 했다. 현빈 보다 잘 생긴 모습에 무령왕도 기뻐할 것이다.

무령왕은 마흔살(501년)에 즉위해 23년간 재위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선왕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전했고,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전하고 있어 다소 혼란스럽다. 후자가 더 유력하다. 분명한 것은 웅진시대 백제의 다섯 왕 중 그와 아들 성왕이 성군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군주였다는 점이다.

무령왕은 살아생전의 업적도 많지만 사후 ‘기념비적인 유물’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1500년 동안 충남 공주 송산리에서 잠들고 있다. 그 곳을 가봤다. 실제 무덤인 송산리 고분군(宋山里古墳群)과 그 아래쪽에 모형전시관이 있다. 왕릉에 들어갈 수 없으니 모형전시관에 왕릉 내부 모습과 부장품들을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온 진품은 능선 너머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그러니 무령왕릉에 오면 자연스레 송산리 고분군을 동시에 보게 되고 이웃의 공주박물관에 가서 진품까지 곁들여서 본다면 제대로 본 것이 된다.

무령왕릉과 5호분 및 6호분.

무엇이 이토록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을까.

우선 그의 무덤이다. 삼국시대 유일하게 이름을 알 수 있는 능이라는 점이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7기의 능이 있다. 능의 주인을 모르니 1호분, 2호분…6호분으로 번호를 매겨놨다. 7호분인 이 무령왕릉 만이 주인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발견도 참 우연히 이뤄졌다. 일제시대부터 숱하게 발굴과정을 거쳤지만 5ㆍ6호분과 붙어있는 이 무령왕릉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제단 쯤으로 여기고 넘겼다. 이 세 능은 봉분이 붙어있을 정도로 가까이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잘 단장돼 구분이 뚜렷하지만 발굴 당시에는 숲이 우거지고 봉분이 무너져 내리고 했으니 쉽게 판별이 안갔음은 이해가 간다.

여기가 무령왕릉 입구다. 안영순 회장님이 안내해 주셨다

그러던 중 1971년 7월5일 6호분 배수작업 중 뒤쪽에서 벽돌이 드러나자 황급히 발굴단이 정해지고 발굴에 들어갔다. 아무 주목을 못 받은 만큼 도굴 피해가 전혀 없었다. 그 덕에 무령왕과 왕비의 부장품을 온전하게 1500년 세상 밖으로 꺼내올 수 있었다. 부부합장묘였다.

발굴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김원용 박사와 국립공주박물관장 김영배 박사, 공주대학교 안승주 교수 등이 중심이 돼 8일 작업에 들어가 단 10시간 만에 완료했다. 그러다보니 문제도 많았다. 밖에는 비가 내렸고 이 엄청난 유물을 절차도 없이 급하게 거둬들였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발굴에 대한 체계화된 교육이 미흡했던 탓에 유물 분류와 정리, 그리고 충분한 촬영이 없이 단 10시간만에 바구니에 급하게 주워담듯 마무리했다. 김원용 박사는 훗날 이를 두고 “내 인생 최악의 발굴”이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왕비의 어금니가 오랫동안 창고에 쌓여있다가 훗날 창고 정리 때 발견된 우를 범하기도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 부부임을 알려주는 각자석판(刻字石板) 두 장이다. 네모 난 이 묘지석(墓誌石)에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 62세인 계묘년(523) 5월 7일 붕어하시고, 을사년(525) 8월 12일 관례에 따라 대묘에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內戌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 癸酉朔十二日 甲申 安曆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새겨져 있었다.

‘영동대장군’은 중국 양무제가 무령왕에게 내린 칭호이니 반가울 리가 없는데 묘지에 그대로 쓴 이유는 잘 모르겠다. 외교관계 상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까. ‘사마왕’의 사마(斯麻)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묘의 주인공과 각종 내력을 적은 묘지석이다. 무령왕임을 알려주는 완벽한 유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무령왕을 처음엔 가매장을 하고 3년째 되던 해 날을 잡아 이 왕릉에 안치했다는 점이다.

또 왕비묘지(王妃墓誌)에는 “병오년(526년) 11월 백제국왕태비가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의 땅에서(빈전을 설치하여) 삼년상을 지내고 기유년(529년) 2월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기어 장사지내며 이와 같이 기록한다” (丙午年十一月 百濟國王太妃 壽終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未朔十二日 甲午 改葬還大墓立志如左)로 돼 있어 백제의 3년상을 확인시켜 준다.

왕의 죽음에 ‘붕(崩)’자를 쓴 것도 눈길을 끌었다. 이 ‘붕(崩)’은 천자를 뜻하는 사람에게 사용하며 황제든 왕이든 ‘죽음’을 뜻하는 최상위의 표현이다. 제후의 왕에는 일반적으로 ‘훙(薨)’을 썼다. 양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속국의 의미를 벗어나 독자적인 왕 또는 황제의 의미를 가진 게 아닌가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또 재밌는 것은 왕의 무덤을 쓰기 위해 토지신(地神)에게 무덤자리를 돈으로 샀다고 하는 증명서, 즉 매지권(買地券)이다.

“돈 1만매, 이상 일건 을사년(525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의 여러 관리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하여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증명을 삼으니,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以前件錢詢 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不從律令)” 라고 하는, 오늘날의 법조문과 같은 표현이 재밌다.

왕릉의 온전한 보전을 위해, 돈 내고 토지신에게 허락받았으니 향후 문제삼지 말라는 모양새다.

이러한 왕의 지석이 출토된 건 삼국시대를 통틀어 처음이라고 한다.

왕릉 내부를 재현해 놓은 모습. 연도와 현실에 널부러져 있는 유물들의 모습을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무령왕릉의 내부는 벽돌로 쌓았다. 특이한 기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옆의 6호분과 딱 2기만 벽돌무덤이다. 1~5호분은 굴식 돌방무덤이다. 전축분 입구 통로인 연도(羨道)와 시신을 안치한 현실(玄室)의 두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벽돌 쌓는 방식도 다양해 무령왕릉은 내벽을 4개 뉘어쌓은 후 1개 세워쌓기를 반복한 사평일수(四平一垂) 방식이고, 6호분은 십평일수(十平一垂) 방식에서 시작해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2평씩 줄여 8, 6, 4평 1수로 축조한 후 그 다음부터는 가로쌓기로 천정을 마무리했다. 당시 교류가 활발했던 중국 양나라 지배층의 무덤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의 삼평일수(三平一垂)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입구와 천정은 아치형으로 돼 있어 고풍스러우며 아름다웠다. 벽면에 등잔불 놓는 자리와 벽화도 있다.

무령왕릉은 웅진시대 백제의 건축과 예술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백제문화의 보고’다. 또한 한국 발굴사상 최대의 학술적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다.

이곳에서만 총 108종 4600여점의 부장품이 출토됐으며 12종목에서 17건이 국보로 지정됐다.

눈여겨 볼 만한 유물로는, 왕과 왕비의 목관이 있다. 일본에서도 최고위층만 쓴다는 금송(金松)을 갖고와서 만든 것인데 거의 썩지 않았다고 한다.

묘지석 2매(국보 제163호), 왕 금제관장식(金製冠裝飾ㆍ국보 제154호)과 왕비 금제관장식(金製冠裝飾ㆍ국보 제 155호), 왕 금제귀고리(金製耳飾ㆍ국보 제156호)와 왕비 금제귀고리(金製耳飾ㆍ국보 제157호), 금제 일곱마디 목걸이와 금제 아홉마디 목걸이(이상 국보 제158호) 등이 세밀하고 화려한 금빛을 발했다.

금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귀금속. 예술품의 극치를 자랑한다. 맨 위 금관 장식, 가운데 왼쪽은 귀고리, 오른쪽은 머리 뒤꽂이, 아래쪽은 왕비의 팔찌다. 특히 오른쪽 은팔찌는 안쪽에 글씨도 새겨 격을 높였다.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듯한 모습의 금제 뒤꽂이(金製三足釵ㆍ국보 제159호), 다리작명 은제팔찌(多利作銘 銀製釧ㆍ국보 제160호)도 과연 예술품이다. 이 팔찌는 안쪽에 제작 연유를 밝히는 글씨까지 새겼다. 말 그대로 1500년 전 찬란했던 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었다.

이 밖에 청동거울(靑銅神獸鏡 ㆍ국보 제161호)과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상상의 동물 돌 짐승상(鎭墓獸ㆍ국보 제162호), 그리고 손잡이 끝에 세밀하게 용을 새긴 고리장식 칼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금동신발과 다리미 등도 볼만하다.

…………………………………

■ 무령왕(武寧王)은 누구? : 부모가 누구인지 뚜렷하지 않지만 백제 제 25대 왕으로 등극했다.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선왕 동성왕을 죽인 신하 백가의 반란을 진압했다.

천도와 선왕들의 잇따른 피살에 어수선한 국정을 바로 잡아 나갔으며 이어 담로제도를 실시, 지방의 주요 지역 22곳에 왕족과 신하를 보내 호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했다.

한성시대부터 고구려에 수세로 몰렸던 상황을 무령왕 대에 일대 반전을 꾀한다. 잇따라 고구려를 선제공격해 승리했으며 고구려와 말갈의 침략도 능히 물리쳤다.

자신감을 얻자 중국과도 교류를 활발히 해 동아시아에서의 백제의 위상도 높였다. 당시 양나라로부터 선진문물을 도입하며 자신감도 생겼다.

선왕 동성왕과 달리 창고를 개방해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했으며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면에서 백제 중흥을 이끈 성군으로 꼽힌다.

아들 성왕이 뒤를 이어 제26대 왕에 올랐으며 그는 다시 사비(부여)로 천도했다.


■ 하마터면 무령왕릉 유물도 일본 갔을 뻔 : 이 귀중한 무령왕릉의 유물도 까딱하면 아무도 몰래 일본으로 넘어갔을 뻔 했다.

일제 강점기 공주고보 교사이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ㆍ1897~1970)은 당시 백제 역사 연구의 최고봉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백제 유적지를 발굴했다. 무려 1천여기를 둘러봤고 수없이 많은 무단 도굴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많은 발굴 유물들은 모두 행방이 묘연한 상태. 어디로 갔을까. 대외명분은 백제유적지 발굴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백제유물 사냥꾼’이었던 것.

당시 ‘그가 없는 백제역사는 없다’고 할 정도로 백제 역사와 유물에 관한 학문적 공적을 많이 남겼고 수많은 한국의 어린 제자들이 그가 정립한 백제역사를 배웠다.

일부 한국인들은 말한다. “가루베 지온은 우리가 유물 발굴에 꿈도 못꾸던 시절 그가 백제역사에 많은 공을 세웠다”고.

또 일부 일본인은 말한다. “가루베 지온은 역사학자로서는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고.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 능에 들어갈 수 없어 출토유물은 이곳에 모형으로 완벽하게 재현해 관람할 수 있게 했다. 실제 유물은 너머 편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가장 아슬아슬했던 순간은 무령왕릉이 그의 손에 잡힐 뻔 했다는 것. 그는 6호분을 최초로 발굴했고 모든 정황을 대비해 그 곳에 아주 중요한 무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바로 옆의 이 불룩한 무령왕릉을 지목했다. 그가 수차례 ‘입질’했지만 당시의 험준했던 묘는 제단을 사용한 자리쯤으로 그에게 인식시키며 그를 돌려 보냈다. 잠든 무령왕도 가슴을 쓸어 내렸을 순간이었다. 그리고 1970년 그가 죽고 딱 1년만에 무령왕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가루베 지온은 한국측으로부터 유물반환을 집요하게 요청받자 처음엔 발뺌하다가 사망 후 아들이 연화문 수막새 등 4점을 건네주고는 끝이었다. 엄청난 유물을 파낸 그가 고작 일본으로 갖고 간 것이 기왓장 몇장이었을까. 국립공주박물관에는 그의 아들 이름이 유물 기증자로 올라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