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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격문학 · 장르 경계를 넘어…소설, 내면의 고독을 끄집어내다
파과구병모 지음자음과모음
딸지키려 사투 벌이는 치매 살인자
감정에 균열이 생긴 살인청부업자
우주너머 연인을 맞이하는 사나이

소설이 가진 대중적 흥미는 그대로
상상력속 ‘존재론적 외로움’ 그려내



본격문학과 장르를 섞어 놓은 듯한 소설이 대세다. 아니 둘의 경계가 없어졌다. 소설이 담아내게 마련인 존재론적 물음과 대중적 흥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소설들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다른 색깔로 독자를 매료시켜 온 김영하의 신작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판타지적 요소를 통해 독특한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는 소설가 구병모와 배명훈의 신작 장편소설이 나란히 출간됐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설세계를 구축해나가지만, 저마다 존재론적 외로움에 닿는다.

김영하의 소설은 범죄 스릴러 소설의 요소를 멋지게 차용했다.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은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살인자는 오래 전, 오랫동안 줄곧 사람을 죽여왔다. 들키지 않은 연쇄살인범이라면 그 치밀함과 깔끔함을 짐작할 만한데 왠지 허점이 보인다. 무엇보다 시간개념이 모호하다. 이어지는 문장은 살인범의 내면으로 한 걸음 끌고 간다.

살인이 소설의 오랜 테마가 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불가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형식적으로 보면 짧은 일기처럼 보인다. 열여섯 살에 아버지를 살해한 이후 수십명을 이유 없이, 오로지 내적 충동에 의해 살해해 온 나의 독백이다.

교통사고 이후 살인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뒤 문화센터 시 강좌를 들으며 입양한 딸 은희와 지내는 조용한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또 다른 연쇄살인범의 출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기억과 시간의 혼돈을 겪으며 사라져가는 기억을 간신히 붙잡아 딸을 지키기 위해 나는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소설은 연쇄살인범과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반전 등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의 형식을 따르지만, 기억과 시간이 사라진 뒤 결국 존재란 무엇인가로 수렴된다.

구병모의 소설 ‘파과’(자음과모음)는 옳고 그름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삶을 이루는 바탕이 없이 살아 온 한 노파의 한순간의 깨달음을 통해 삶의 허무를 얘기한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고의는 아니지만’을 통해 구병모 식의 환상을 그려 온 작가는 이번 소설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깊어졌다.

주인공은 평범한 60대 노부인. 그의 직업은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40년 동안 수많은 표적을 단숨에 처리하며 업계 대모의 위치에 오른 프로페셔널이다. 무정하고 냉혹하게 스스로를 단련하며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그녀의 늘그막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고 폐지 수집하는 노인의 리어카를 정리해 주며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과 공허를 읽어낸다.

또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대상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자신의 정체를 눈감아 준 강 박사에게 남다른 감정마저 품게 된다. 언 땅 위에 여린 싹이 돋듯 굳은 마음의 벽을 뚫고 감정의 순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손에 놓인 뭉그러진 과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연장을 다루다 깨지고 상한 손을 보듬기 위해 네일아트를 찾는 여자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장르의 옷을 입은 소설들이 올 여름 독서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재미와 나를 되돌아보는 두 마리 토끼 잡기다. 사진은 위쪽부터 소설가 구병모, 배명훈.

배명훈의 ‘청혼’(문예중앙)은 현실의 문제를 우주의 공간으로 확장해 풍자적으로 그려 온 작가의 우주적 로맨스다. 아득한 시간과 거리의 벽을 사이에 두고 섬세한 감정선이 교차하는 연애란 게 가당키나 한 것일까.

막막한 우주공간에서 정체불명의 적과 대치하고 있는 궤도연합군의 작전장교인 ‘나’는 우주에서 태어나 중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나의 여자친구는 지구에서 살고 있다.

나는 중력을 감당하기 힘들지만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지구에서라도 살 각오가 되어 있다. 휴가를 받아 여자친구를 만나러 170시간을 날아 지구를 찾지만 마음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귀환한다. 몇 차례 전투 후 전쟁에 대해 회의를 느끼던 차에 지구로부터 먼거리를 날아 그녀가 찾아온다.

천체물리학과 군사학 등 작가가 꾸준히 탐독해온 지식들이 이야기를 탄탄하게 받쳐주는, 연애이야기는 다르지 않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외로움과 사랑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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