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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스포츠 칼럼 - 박지영> 미술관 바닥에서 그림 그리는 아이들
3년 전 영국 런던에 살 때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아이와 반 친구들이 수업시간에 테이트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상설전시장에 들어가자 미술관 교육담당 직원은 학생들에게 각자 맘에 드는 그림을 하나씩 고르라고 했다. 아이들은 싸이 톰블리,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거장의 그림 앞에 섰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미술관 바닥에 엎드려 하얀 도화지에 그 그림을 따라 그렸다. 작업이 끝나자 미술관 직원은 아이들이 고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 엽서를 한 장씩 나눠주며 그림에 관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들아이가 이날 그린 그림은 마크 로스코였다. 진한 노란색과 밝은 노란색이 결합된 로스코의 대표작 ‘무제(Untitledㆍ1950~1952)’다. 아이는 “엄마, 색깔이 너무 예쁘죠?”라며 뿌듯해했다. 그날 아이는 자신이 고른 작품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 하나라는 것도, 그 작가가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풍의 대가라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미술지식이 없으면 또 어떠랴. 아이는 로스코를 따라 그리며 마음 한 편도 노란색으로 물드는 따뜻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영국에서 이런 자유분방한 미술교육에 젖어 있다가 한국에 오니 전혀 딴 세상이 펼쳐졌다. 한국의 초등학교에선 각종 미술대회가 쏟아진다. 자동차 스케치는 전문 차디자이너 뺨칠 정도로 정교하게 그리는 아들이기에 ‘상 하나는 타오겠지’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번번이 상 타기에 실패한 아이는 끝내 낙담하고 말았다. 나중에 지인에게 물어보니 아이가 상을 못 탄 이유가 있었다. “학원을 다니거나 따로 과외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야 상 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제로 주제에 맞게 그림을 서너 번 반복해서 연습한 뒤 대회에 나가기도 한단다. 아마추어처럼 그리거나 개성있게 그린 작품은 상과 인연이 먼 것 같았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1학년 아이다. 한창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그림을 표현할 나이에 ‘전문교육을 받은’ 그림이 상을 받을 확률이 높다니, 그 현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국의 초등학교에선 미술교육이라는 것이 그리 거창하지 않다. 일주일에 서너 번 그리기와 만들기를 하지만 그걸 가지고 줄을 세워 상을 주진 않는다. 체육대회를 해도 달리기에서 1등을 하건 꼴찌를 하건 그냥 ‘잘했어요’라는 큼지막한 스티커를 모두의 가슴에 붙여준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이 아니다. 진정 아이에게 창의력과 예술적 감각을 키워주고 싶다면 끊임없이 미술관을 드나들며 예술과 친해지는 기회를 줘야 한다. 영국은 패션, 미술, 무용, 영화 등 창조적인 문화산업에서 요즘 세계 최고의 자리에 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거장의 그림을 따라 그리고 거기서 자신만의 느낌과 표현을 키우는 데서 그 힘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창조경제의 꽃을 피우려면 사람부터 키워야 한다. 그 풀뿌리 단계인 초등학교 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 목적이 아닌 과정을 중시하는 미술교육이 오늘따라 절실해 보인다. 또다시 다가오는 그림대회를 앞두고 풀이 죽어있는 아들아이의 모습을 보며 애끓는 모성에 몇 자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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