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만 해도 싱그러운 가사. 윤종신의 ‘수목원에서’의 한 구절이다. 가을이란 어감과 조금 거리가 있는 듯도 보이지만, 산책을 할 때면 항상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 이미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 문턱에 다다르고 있다. 싱그러운 여름을 지나, 가을의 운치를 지나, 이제 가을 사이사이로 마치 요즈음처럼 긴장감을 불어넣듯 겨울 찬바람이 몰아칠 때면, 왠지 모를 조바심이 난다. 이제 겨울이 오는구나. 또 한해가 끝나가는구나.
상수동도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하긴, 가을은 진작 왔고 이제 겨울이 슬금슬금 성질을 드러낸다. 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젊은이의 데이트 코스로, 마니아들의 안식처로 유명한 상수동이지만, 이곳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 중 하나는 바로 한강변 산책길이다. 절두산 성지나 망원지구까지 이어지는 한강변 산책길은 상수동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없는 지역.
상수동에서 한강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건 쉬운 편은 아니다. 상수역에서 한강방면으로 걷다 사거리가 나오면 좌회전. 이후로 언덕길을 따라 100미터가량 내려가면 우측 편에 한강으로 가는 지하통로가 있다.
조금 더 장거리를 원한다면 광흥창역에서 한강으로 진입하는 방법도 있다. 광흥창역에서 한강 방향으로 서강대교 밑을 걸어가다 보면 이 역시 한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다.
한강변에 들어서면 왼편으론 마포대교, 오른편으론 절두산성지로 가는 방향. 절두산 성지 방향으로 걷다 보면 길가에 서강팔경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레스토랑이 있는 이 건물은 강변북로에서도 보이는 탓에 운전자 사이에선 꽤 알려진 건물이다. 만만한 가격은 아니지만, 한강을 바라보는 전망이 워낙 유명해 각종 기념행사나 하우스웨딩 장소로도 쓰이는 곳.
조금 더 가다 보면 절두산 성지가 나온다. 국사책에도 나온 바 있던 곳으로, 절벽 같은 암석과 성지 건물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처음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비경이지만,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곳의 역사는 그리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다.
이 봉우리는 용의 머리나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용두봉(龍頭峰)이나 잠두봉(蠶頭峰)으로 불리는데, 이곳의 이름이 절두산으로 된 데에는 병인양요 이후 1만여명의 천주교 신자를 잡아 이곳에서 목을 잘라 처형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절경 뒤에는 이처럼 ‘핏빛’의 잔혹한 역사도 숨겨져 있다. 천주교 신자라면 특히나 한 번쯤 꼭 방문해볼 필요가 있는 성지이다.
절두산성지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절두산 성당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절두산 인근을 공원으로 조성,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나 관련 조각상, 전시물 등을 공원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절두산을 빠져나와 마을버스 종점 옆으로 50미터가량 걷다 보면 양화진 외국인선교 묘역도 있으니, 함께 돌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지나, 또 산책으로 한층 목도 마르고 출출해졌다면, 다시 상수동으로 돌아갈 차례. 절두산 성지를 나와 가로수가 우거진 길을 걷다 합정역 방면으로 향한다. 길 끝에 도착하면, 합정역 7번 출구. 가을 내음도 듬뿍 담고, 건강도 챙기고, 역사도 배우는, 일석삼조의 상수동 산책길인 셈. 밥ㆍ영화ㆍ커피가 지겹다면, 이번 상수동 데이트에는 가볍게 산책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오밀조밀한 길을 따라 걷다 한강변의 시원한 바람과 길거리에 이어진 코스모스를 관람하고. 마치 유럽 속 풍경처럼 잔디밭 위에 놓인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절두산 성지를 거쳐 상수동 특유의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거닐고 나면, 그녀와, 그 사이에 남아 있던 작은 어색함도 슬그머니 사라졌으리라. 강남 빌딩숲에선 느낄 수 없는, 알콩달콩한 행복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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