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오래전에 고려를 버렸다. 길고 길었던 방황을 지금 여기서 끝낸다. 이 자(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 자와 함께 난세를 끝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KBS 1TV의 새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쏟아진 퓨전사극에 피로감을 느낀 시청자들은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사극에 채널을 고정했다. 지난 4일 방송된 첫 회의 시청률은 11.6%(이하 닐슨코리아 전국가구기준)로, 최근 드라마 초반 시청률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특히 드라마를 잘 시청하지 않는 50대(12%)ㆍ60대(17%) 남성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정도전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혼란기를 헤쳐 나갔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정치적 혼란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개혁의 아이콘’ 정도전을 향해 몰리는 관심은 가볍게 넘어갈만한 문화현상이 아니다. 이는 퓨전사극을 향한 대중의 반작용 뿐 만 아니라 어지러운 정치ㆍ사회ㆍ경제 현실이 하루 빨리 극복되기를 바라는 열망의 표현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한국사의 쟁점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며 역사서의 대중화를 이끌어온 역사학자 이덕일이 첫 번째 강연집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를 출간했다. 이 책은 대하드라마 ‘정도전’ 팀의 자문요청으로 저자가 펼친 세미나 형태의 강연 내용을 담고 있다.
정도전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고려 말 위기를 극복하고 조선을 설계했으나 큰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이방원의 칼에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혁명가다. 그러나 저자는 정도전을 조선의 설계자라는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정도전을 세상으로 이끌어낸 원동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가 이성계를 만나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한 이유와 그의 이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 말 혼란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을 토지제도로 보았다. 토지가 모든 생산의 원천이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권문세족의 광범위한 토지겸병으로 양민들은 송곳 꽂을 땅 하나 없는 형편이었다. 땅 하나의 주인이 대여섯 명을 넘기기도 했고, 소작료가 9할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정도전은 토지제도의 폐해를 없애는 것을 새 왕조 개창의 명분으로 삼았다. 권문세족의 토지을 몰수해 백성에게 분배하고자 한 과전법은 새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설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 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율)은 15%로 회원국 평균인 11.1%보다 상당히 높다. 빈곤의 근원은 불안정한 일자리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32~35% 수준으로 회원국 중 1위다. 저임금 근로자(정규직 근로자 중간 임금의 3분의 2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정규직 근로자) 비율 역시 26%로 불명예스럽게 1위다. 저소득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서기 점점 어려워지고, 빈곤의 대물림 현상이 굳어지고 있다. 당연하게도 한국의 행복지수는 27위로 최하위권이다.
사기(史記)는 ‘왕자이민위천(王者以民爲天),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즉 ‘임금이 된 자는 백성을 하늘 섬기듯 섬겨야 하고, 백성들의 하늘은 임금이 아니라 곧 식량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도전 경제사상의 핵심은 ‘밥이 백성의 하늘’이었다. 600여년의 세월을 격해 브라운관과 책으로 환생한 정도전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백성들이여, 지금은 안녕하십니까?”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